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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과 탕수육

2018-08-03

문화 문화놀이터








    '은자의 나라'로 불리던 조선에 개항장이 열리면서 외국인들이 몰려든다. 부산을 시작으로 원산을 거쳐 1883년 인천이 개항되고 이듬해 청국영사관이 설치되고 청국조계지가 설정되었다. 이때부터 청나라 산동지방에서 넘어온 이들이 지금의 인천 차이나타운에 모여 살았는데 당시에는 이곳을 청관이라 불렀다. 청나라에서 온 이들은 청요리집, 호떡가게, 비단장사 등을 한다. 청요리집은 지금은 중국집으로 당시에 고급요리를 파는 곳이었다. 지금의 중국집과는 달리 짜장면을 판매하지도 않았다.


짜장면의 탄생

    짜장면의 모태가 되는 음식은 작장면(炸醬麵)이라 하여 삶은 국수에 야채와 중국식 된장을 넣어 비벼 먹는 것이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장(醬)을 볶아서(炸) 올린 국수(麵) 정도가 되겠다. 그만큼 조리방법이 간단하고 싸고 편하게 먹을 수 있어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이용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짜장면박물관에는 노동자들이 짜장면을 먹는 장면을 재현해놓았다. 이러한 중국인 노동자들의 면요리를 한국식 입맛에 맞게 소개한 곳은 ‘공화춘’으로 알려져 있다. 공화춘은 산동회관으로 시작해 1912년 공화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1983년 폐업을 했지만 지금은 짜장면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46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지금의 짜장면을 판매한 것은 1905년부터라고 한다. 이를 기준으로 인천시에서는 2005년 ‘자장면탄생 100주년 기념, 자장면대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짜장면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인기를 누렸을까? 이를 당시 신문기사를 토대로 추측해보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중국음식은 호떡이었다. 호떡으로 인해 국부(國富)가 유출되고 있다는 논설이 나올 정도였다. 또 중국요리가 소개되는 기사에서도 만두, 탕수육, 잡채는 있어도 짜장면에 대한 언급은 없다. 특히 청요리집은 지금처럼 대중음식점이기보다는 고급요리집에 가까웠다.
    반면 짜장면은 태생이 그러하듯이 싼값에 끼니를 때우기 위한 음식이었다. 그 가격을 보면 1975년 138원, 1985년 616원이었는데 1975년 당시 5인가구 평균소득이 65,000원 정도였고 80㎏ 쌀 한 가마니가 20,000원이었으니 비 싼 음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짜장면이 지금과 같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한때 졸업식 음식으로 당연시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1960년대의 절미운동과 상관이 있다. 특히 수요일, 토요일 점심에는 쌀로 된 음식의 판매까 지 금지되었다. 이러한 절미운동과 함께 분식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1963년부터 한국에서는 화교의 토지소유를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와 함께 농촌에서 작물을 재배하던 화교들이 도시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고급요리에 속하는 청요리보다는 만들기 쉬운 짜장면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된다. 한 연구에 의하면 1972년에는 화교의 77%가 중국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에 짜장면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철가방’이다. 신속배달이라는 구호 아래 골목골목을 누 리던 철가방은 짜장면 대중화에 한 주역이다. 배달가방은 최초에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무겁고, 음식물 국물이 나무에 스며들어 위생상 좋지 않았다. 이것이 알루미늄으로 대체되면서 ‘철가방’이 등장한 것이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블랙데이, 문화 속의 짜장면
    짜장면은 영화나 노래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북경반점』(1999)처럼 짜장면과 춘장을 직접적인 소재로 한 영화도 있으나 짜장면 먹는 장면이 나오거나 짜장면을 통해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이 흔히 쓰인다. 이러한 짜장면은 2006년 문화관광부에서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100대 민족문화상징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선정 사유는 “대표적인 외식메뉴이며 세계화가 가능한 음식”이라고 밝혔다.
짜장면은 단순히 장을 부어 먹는 면에서 발전하여 지금은 옛날짜장, 간짜장, 유니짜장, 삼선짜장, 사천짜장, 쟁반짜장, 고추짜장, 유슬짜장과 같은 다양한 종류와 함께 짬짜면과 같이 짬뽕과 짜장면을 한 그릇에 내놓기도 한다.
    짜장면은 현대에 들어오면서 젊은이들의 세시풍속에 들어오기도 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생업주기에 맞추어 세시들이 생겨난 데 반해서 현대사회에서는 기업들의 상업적 마케팅과 함께 새로운 세시가 등장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빼빼로데이이다. 이외에도 매월 14일에 맞춰 각종 ‘데이’를 만들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위의 네 가지 정도이다. 블랙데이(4월 14일)는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때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검은 옷을 입고 검은색의 짜장면을 먹는다는 날이다. 어느덧 짜장면이 젊은이들의 일상에도 녹아든 것이다.




부어 먹느냐 찍어 먹느냐, 탕수육

   짜장면과 같이 먹는 요리는 탕수육이다. 짬뽕전문점에서 짜장면은 안 팔아도 탕수육은 팔고, 시장에서는 탕수육만 전문적으로 파는 곳도 있다. 짜장면과 짬뽕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팔린 요리는 탕수육이 아닐까? 굳이 통계나 보고서를 인용하지 않아도 쉽게 동의할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193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1937년 신문기사에는 중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종로지역의 중국집의 8할 이상이 폐휴업을 하고 그 결과 호떡, 우동, 탕수육을 맛볼 수 없어 미각에 비상이 걸렸다는 내용이 있다. 1958년 신문기사에는 독자들이 따라할 수 있게 두 개의 중국요리 만드는 법을 소개했는데 탕수육과 고구마탕이다.
    중국집의 다른 요리에 비해 싼 가격인 탕수육은 짜장면처럼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음식이다. 반면 어떤 음식보다 아픈 중국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음식이다. 1842년 청나라의 패배로 끝난 아편전쟁 이후 영국과 난징조약을 맺고 홍콩을 할양하기에 이른다. 또한 많은 영국군들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젓가락에 익숙해 있지 않았고 기름기 많은 청나라 음식에 불만이 많았다. 이러한 영국군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청나라 궁정요리사들이 만들어낸 음식이 바로 탕수육이었다. 돼지고기를 튀기고 영국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광동지역 스타일의 소스를 끼얹은 것이다. 이러한 탕수육은 한국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신맛보다는 단맛을 강조하고, 소스의 점도가 증가한다. 또한 케첩이나 과일 통조림의 국물을 사용하면서 자극적으로 변했다.
    탕수육은 탕초육(糖醋肉)에서 유래한 말로 달고 신맛이 나는 고기라는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고기에 달고 신 소스를 부어 먹고 있 다. 특이하게도 한국에서는 고기에 소스를 부어 먹느냐, 소스에 고기를 찍어 먹느냐는 이른바 ‘부먹’ VS‘찍먹’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눅눅한 시리얼VS 바삭한 시리얼, 일본 팥빵에서의 낱알 팥 VS 으깬 팥 논쟁과 같이 결론 없는 논쟁의 하나이며 그만큼 탕수육이라는 음식이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방증하는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