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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중앙공원, 성안길 따라Ⅰ

2018-04-10

문화 문화놀이터


북적북적 중앙공원, 성안길 따라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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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지금은 ‘찰칵’ 소리와 함께 일상을 기록하지만 카메라와 사진이 없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나무와 바위에 삶의 흔적을 남겼다. 그때 그들의 삶과 문화가 궁금하다면 청주의 역사박물관이라 불리는 중앙공원으로 걸음을 옮겨보자.
    청주는 도시의 중심부를 기준으로 반경 1.5km 안에 국보와 유형문화재, 기념물들이 집중 돼 있는 곳도 드물다. 청주의 도시 역사를 최소 1,500년으로 본다면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근대로 이어지는 천 년 이상의 도시 역사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산책을 하듯 걸으면 2~3시간이면 충분하다. 그 첫 걸음이 중앙공원이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청주 중앙공원은 청주의 중심에 있다하여 중앙공원라고도 불리지만 비석이 많아 비림공원이라고도 한다.
    척화비, 조헌전장기적비 등 10여 개의 비석과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약 900년을 버티고 있는 압각수鴨脚樹(은행나무로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 옛 청주관아의 누각이던 망선루, 충청병영문 등 다수의 문화재가 청주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있다.





청주성 탈환 기념비 조헌전장기적비

    조헌전장기적비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임진왜란 때 조헌의병군의 청주성 탈환을 기념하기 위하여 1710년(숙종 36)에 세운 비이다. 조헌趙憲. 살아 계시다면 달려가서 넙죽 엎드려 큰절 올리고 싶은 분이다. 임진왜란에 왜적에게 빼앗겼던 청주읍성을 되찾은 의병장, 그에게 큰 절 한 번 올리고 싶은 이가 어찌 또 없을까. 이런 마음이 닿아 세운 추모비가 바로 조헌전장기적비이다. 조선 선조 때 학자였던 의병장 조헌(1544.중종 39~1592.선조 25)은 가는 곳마다 그 곳 선비의 풍속을 새롭게 다지는 분이셨다. 올곧은 성품으로 곧은 말을 잘하기로 유명했고, 강직하여 비리와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다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까지 좌천과 파면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이 보은으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등 공이 있었으나 순찰사 윤선각의 시기를 받아 홍성 지방으로 옮겨가 다시 의병 1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 시기에 이미 왜적은 청주에 진을 치고 있었고 관군은 대적이 안 되어 승장 영규대사만이 승병을 이끌고 적을 견제하며 조헌은 영규와 합세하여 청주읍성을 탈환했다. 흔들릴지라도 부러지진 않겠다는 강직한 마음, 목숨을 마쳐내 사람들을 지켜 내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 읍성을 되찾는 영광까지는 아니어도 괜찮다. 이 작은 비석 앞에서만큼은 내 생의 가장 영광스러웠던 그때, 거침없고 당당했던 나 자신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충분하다.




교육 도시 청주의 시작 망선루

    망선루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1가에 있는 고려시대의 누각.. 원래 객관 동쪽에 위치하며 옛이름은 취경루였으며, 1461년(세조 7)에 목사 이백상이 중수하고 한명회가 망선루라 이름을 지었다. 위풍당당한 어깨와 너른 가슴, 자신감에 차 있으면서도 선한 눈매를 가진 남자의 모습을 건물로 짓는다면 아마도 망선루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을까. 망선루와 마주하고 있으면 젊은 도령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능선과 시내, 새들의 울음소리를 벗 삼아 시를 짓는 묵객의 모습이 훤하다.
망선루는 청주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경치를 즐기고 시를 읊던 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객사 옆에 있었는데 청주를 찾았던 관료나 문인들이 올라 남긴 시가 있다. 시와 노래, 그림이 절로 나오던 망선루에 대한 애정은 고려 공민왕도 남달랐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으로 파천 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돌아가는 도중 청주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며 과거를 보고 그 합격자 명단을 망선루에 걸어 두었다고 전해진다.
    망선루의 원래 이름은 경치를 둘러볼 수 있다는 뜻의 ‘취경루’였는데 누각이 낡고 헐어 1461년 목사 이백상이 새 단장을 하고 한명회가 누각의 이름을 ‘망선루’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망선루와 관련 된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흔히 청주를 교육의 도시라고 하는데 그 시작이 이 곳 망선루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청주 관아 안에 있던 망선루는 일제강점기에 현재 청주제일교회 안으로 옮겨졌는데 청년운동가 김태희를 비롯한 청주 청년회 회원들은 전통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하여 지역민과 독지가들의 뜻을 모아 경비를 마련하고 1923년 청주제일교회 안으로 옮겨 세웠다. 이후 망선루는 청남초등학교의 전신인 청남학교와 세광중.고 교사로 사용됐고 청남학교 교사 최창남은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보급하고 우리말 동요와 동시를 남기며 지역의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활동을 전개했다. 청주시는 2000년 제일교회에서 중앙공원으로 망선루를 이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을 지켜낸 강직함 척화비

    청주 척화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23호로 충북 청주시 남문로 중앙공원에 있는 척화비. 비신은 윗 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며, 다소 거친 화강암으로 된 비갈형 비석이다.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뒤 전국의 요충지에 세운 척화비중의 하나이다. 하수굿돌로 사용하던 것을 발견하고 중앙공원에 자리를 만들었다.
    중앙공원에서 큼직하게 눈에 띄는 것만 바라보다가 돌아서려는데 공원 구석에서 거무스레하게 세월의 흔적을 안고 있는 비석 하나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망선루 오른편에 자리한 척화비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온 백성에게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고자 전국 교통의 요지에 세운 비석이다. 흥선대원군은 전국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웠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전국의 척화비가 철거 됐고 현재는 20개만 남아있다.



구백살 은행나무 압각수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로 압각수는 나이가 9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로 높이가 30m, 둘레가 8m이다. 압각수란 이름은 잎의 모양이 오리의 발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생겼다는 주장과 나무 뿌리가 물오리발처럼 발가락 사이가 붙어있어 생겼다는 주장이 있다. 때 없이 찾아가도 언제나 반기는 이,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만 있어도 위로가 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런 분이 여기 청주에 계신다. 그분의 품은 한없이 넓고 넓다. 집안에 어른은 계시는 존재만으로 든든한 것처럼 청주의 압각수 역시, 청주 시민들에게는 든든한 어르신 같은 존재이다.
    중앙공원의 압각수는 900년 전부터 청주에 뿌리를 내리고 시민들과 함께 숨 쉬고 있다. 공원을 가득 채운 은행잎과 굵직한 기둥, 그 기둥의 상처를 보고 있노라면 900년이란 세월을 감히 가늠해 볼 수 있다. 청주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지치면 압각수 아래 기대고 앉는다. 그 기둥에 등을 맞대고 있다 보면 ‘하늘 한번 쳐다보고 눈 한번 질끈 감아봐라. 사는 게 그런 거란다.’라며 토닥여 주는 듯 하다. 어찌 오늘 날 우리의 삶만 품었을까.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압각수는 고려 충신들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 고문서에 따르면 고려 말 공양왕 때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 일파를 없애기 위해 중국 명나라로 가서 이성계가 공양왕과 함께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이색, 정지, 이숭인, 권근 등이 청주 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자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성안에 홍수가 났다. 이 때 근처에 나무가 있어 죄수들이 올라가 목숨을 건졌다. 그 나무가 바로 압각수였다는 것이다. 압각수는 하나의 오래된 나무라기보다는 청주라는 도시의 수호신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그가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보라. 천년의 시간을 그 자리에 그리 버티고 있다는 게 예삿일인가. 그 앞에 서면 그냥 숙연해지는 신목神木이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에 있는 조선 말기의 건물로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15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익공 팔작지붕 건물. 청주읍성안에 있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이다. 병영과 더불어 건물 십여 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병영절도사 영문 한 채만 남아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의 본래 위치는 충남 해미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을 겪으면서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이던 청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어 효종 2년(1651) 청주로 이전하였다. 네모진 주춧돌 위에 세운 2층의 누문으로 앞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