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중국 홍콩과 광저우의 용선축제

2018-08-03

문화 문화놀이터


중국 홍콩과 광저우의 용선축제
''


 




    고대부터 숫자는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운수를 점치는 방법으로 이용됐다. 단오(端午)는 양기가 충만한 날로 단양절로 불렀지만, 유독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라 하여 악월로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했다. 지역에 따라 역신 종규(귀신을 퇴치하고 악령을쫓아내는 신)를 걸어놓거나, 미꾸라지와 조개를 방생해 벽사와 기복을 염원했다. 특히,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싸이룽저우(용선 경주) 풍습은 고대부터 황실과 민간에 널리 성행했지만, 신중국 성립 후 문혁의 강공 드라이브에 걸려 퇴색됐다. 하지만 이를 회복하기 위한 범정부적 노력이 문화유산보호운동으로 이어졌고, 2007년 12월 단오를 국가공휴일로 선포한다. 2009년 용선 축제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2011년 용선 경주가 단독으로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세대와 성별을 아우르는 스포츠로 6월의 여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중국인 스스로 용의 후예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드래곤보트를 타고 푸른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역동적인 모습은 도전정신과 모험심을 보여준다.


미뤄강에서 조우하는 어부와 시인

    중국인들에게 ‘퉁저우궁지(한 배를 타고 강을 함께 건너다)’란, 분열과 갈등의 난제에 힘을 합 쳐 극복하려는 해법의 과정이다. 배로 강을 건너는 징두는 고대부터 유행했고, 『형초세시기』에 세 명의 망자를 기리는 고사가 전한다. 효녀 조아(曹娥)와 초나라의 대부 오자서(伍子胥), 그리고 초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이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유래는 바로 전국시대 초나라 회왕이 총애했던 정치가이자 시인인 굴원의 고사 이다.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변방을 지키기 위한 제후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갈렸다. 진(秦)이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망에 맞서 제후들은 치열한 설전을 벌이며 연합의 명분을 찾아야 했다. 초는 남쪽의 방대한 영토를 차지했지만 진과 싸워 패배했다. 제와의 통합이 거슬렸던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은 회왕에게 무관에서 만나 결맹을 맺자고 친서를 보낸다. 굴원은 만류했지만 화친을 거부할 수 없었던 회왕은 진에 들어간다. 진은 초의 땅인 무군(巫郡)과 검중(黔中)을 바치고 회왕을 데려가라고 하지만 협상결렬로 왕은 병사한다. 초는 울분했고, 경양왕이 왕위에 오른다. 그 뒤 굴원은 진의 공격을 대비하고 인재를 등용해 강권한 국가를 만들기를 권고하지만, 오히려 입지만 좁아지고 결국 후난으로 유배된다.



2014년 6월, 홍콩 스탠리해변에서 열린 용선 축제에서 용선 경주가 진행되고 있다.

    굴원은 우국에 대한 충정과 백성들에 대한 근심을 시로써 달랜다. 강가에서 어부를 만나 자신의 신세를 한 탄하며 나눈 대화가 어부사에 전한다. 어부가 묻기를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그 흐름을 좇아가야 하는 게 순리이지 않느냐 묻자, 굴원은 “세상이 온통 혼탁한데나 홀로 깨끗하고, 세상사람 모두가 취해있는데 나 홀로 깨어있다”며 현실에 순응할 수 없다고 회답한다. 누구보다 애국심이 강했던 그는 무력한 정치가로 전락한 자신을 한탄하다 초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뤄강에 투신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어부들은 굴원의 시체를 찾기 위해 노를 저어 강바닥을 모두 뒤져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고기떼가 굴원의 시체를 훼손하지 못하게 하려고 찹쌀을 강에 뿌렸는데 훗날 쫑쯔(대나무 잎에 찹쌀과 대추, 돼지고기 등을 넣어서 찐 것)를 던지는 풍습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굴원을 비롯한 이들의 선행이 회자되면서 용선 축제가 유래했다.


강을 건너는 용의 후예들

    징두에 사용되는 용선은 뱃머리에 용의 형상을 달거나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은 뿔은 사슴, 머리는 낙타, 눈은 토끼, 몸통은 뱀, 배는 대합,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 귀는 소를 닮았다. 중국인들은 아홉 동물이 기이한 조화를 이룬 용을 신성한 존재로 인식했다.
    용선 축제는 정부와 대중적 문화 코드가 순차적으로 교차하며 발전했다. 1978년 타이완의 작곡가 허우더 젠(侯德健)의 <용의 후손>을 장밍민이 번안해 부르면서 중국에 유행했고, 용의 후예라는 중국민족의 별칭이 생겼다. 중국은 1979년 홍콩(샹강)의 용선 경주를 광저우에 도입했고, 단오절 주요 문화를 복원했다. 더욱이 1984년 중국국가체육위원회가 용선 경주를 전국 경기종목으로 결정하면서 규모가 스포츠를 방불케 할 정도로 커졌다. 용선 경주는 참여자의 기량과 활력, 스피드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다. 중국인 스스로 용의 후예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푸른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역동성은 연대의 공동체를 넘어서는 도전이며 모험의 과정이다.



01. 한족과 쭈앙족, 부이족, 동족, 투쟈족, 걸라오족 등의 일부 소수 민족과 해외에 거주하는 화교가 이 축제를 즐긴다.
02. 사람들은 쑥이나 창포를 문 위에 매달고,향낭을 차고 오색 비단옷을 입고,종이 공예품을 창문에 붙이고, 영생하는 종규의 그림이나 호부(虎符)를 건다.
03. 2011년 6월, 광저우에서 열린 용선 축제에서 용선 경주가 진행되고 있다.



홍콩·광저우·베이징에 이어지는 여름축제

    근대 이후 용선 경주를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이 홍콩(샹강)이다. 1976년 홍콩여유발전국은 관광을 활성화하고 색다른 문화체험을 제공하고자 홍콩국제룽저우초청경기를 거행했다. 대회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면서 1978년 빅토리아 항구를 시작으로 홍콩 해변 전역으로 확대됐다.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자 1977년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과 대만 주변 화교국가는 물론 해외로까지 퍼져나갔다. 1979년 아오먼(마카오)도 용선 경주대회를 복원할 정도로 엄청난 열의를 보였다. 1985년 10주년 기념으로 여자경기를 신설했고, 1995년 국제남녀선수권대회를 열면서 경기 규모, 멤버 구성 등 안정된 체계를 갖춰갔다. 또한 배의 용머리 크기와 이미지를 변용시켜 보다 화려하고 창의적 재미를 제공하고있는데, 형형색색의 용선이 징과 북소리 속에서 서로 선두를 다투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1996년 용선 경주대회가 광저우국제초청경기로 승급되면서 초창기 20팀이 100팀으로 늘어나는 폭풍 성장 을 한다. 2010년에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카누를 능가하는 ‘드래곤보트’로 전통문화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난 2011년 5월, 용선 경주가 국가급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대중적 성원과 인기는 더욱 극대화됐다. 세대, 지역, 직장, 가족 단위 등에 따라 전통문화체육대회, 국민건강대회, 대학생대회를 열어 강과 호수가 있는 곳이라면 용선 경주의 문화체험장이 되었다. 용선 축제의 전망은 여전히 밝다. 기억하자. 북을 치고 함성이 울리는 순간, 강을 건너는 한 가지 목표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