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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휼문화 전통사회 vs 기부문화 현대사회

2018-12-07

문화 문화놀이터


구휼문화 전통사회 vs 기부문화 현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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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기업가는 기업가대로, 자영업자는 자영업자대로, 월급생활자는 월급생활자대로, 수많은 구직자들은 또 당연히… 노년은 노년대로, 중년은 중년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누구 하나쉽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고, 남을 받아줄 여유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어느 때나 세상살이는 녹록지 않았고, 지금껏 어느 때고 괴로움 없는 시대가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사람들의 삶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서로를 보듬어 주려는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전통시절부터 내려오는 개인차원의 예, 그중에서도 비교적 잘언급되지 않은 의장(義庄)을 소개한다.


이웃을 돕기 위한 농장

    의장(義庄)이란 일정한 토지를 마련하여 거기에서 나는 것으로 친족을 돕거나 빈민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공동 농토 혹은 농장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의장(義莊), 의전(義田)이라고 하여도 같은 뜻이다.
    의장은 중국 송나라 때의 재상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처음 실시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범중엄은 자신의 고향인 고소에 수천 묘의 땅을 사들이고 일가중에 덕망 있는 사람을 관리자로 세워서 그 땅에서 나는 곡식을 모아 일가 중에 형편이 어려워 혼인이나 장례 등을 치르지 못하는 자들을 돕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고소 땅의 의장이라고 하여 ‘고소의장(姑蘇義莊)’이라고 부르고 있다. (『송사(宋史)』권314, 「범중엄열전(范仲淹列傳)」 참고.)



좌) <기년진곡도(機年賑穀圖)>조선은 백성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먹을 것을 구하러 유랑하게 되고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백성을 돕기 위해 구휼정책을 폈다.
우) 현대사회의 온라인 기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 종법(宗法)에 따른 유교적 예교(禮敎)가 전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의장 역시 시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른 시기의 예를 고려시대 학자 이곡(李穀, 1298~1351)의 문집에서 볼 수 있다. 이곡의 「의재기(義財記)」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 글은 이곡과 그의 벗 이경보의 문답을 적고 뒤에 이경보와 그의 친인척의 재물 출연 사실을 적는 방식으 로 이어지고 있다. 끝에 이경보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가까운 형제와 먼 형제를 모두 합쳐서 20여 인이 있는데, ……지금 각각 기금을 약간씩 출연하여 의재(義財)라고 명명하고는, 해마다 두 명씩 교대하여 번갈아 가며 주관하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달이 그 이자를 받아서 경조(慶弔)와 송영(送迎)의 비용에 대비하는 한편,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장차 구휼하고 전별하는 밑천으로 삼으려 하는데, 앞으로 자손들로 하여금 이 법을 계속 지키면서 잘못되지 않게 하려고 한다. 이는 대개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설립한 의전(義田)의 고귀한 뜻을 본받으려 함이니…” (『가정집』권2, 「의재기」)
    땅이 아니라 재물을 냈다는 점에서 ‘의재(義財)’라고 명명했지만, 친족들 간에 재물을 내어 다른 친족들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구휼한 의장의 예와 같다. 자본금을 모아 그 이자로 친척들의 경조사와 손님맞이의 비용, 구휼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는 것이다. 이곡은 이경보의 이런 예에 대해 칭찬하면서 그것에 대한 글을 써준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친족 간의 이런 예는 분명 또 국가적인 차원의 구휼책, 진제책(賑濟策)이 아닌 민간 차원의 나눔이다.
    의장제도는 대체로 한 사람 혹은 친족 몇 명이 땅이나 재물을 내어 친족의 구제에 사용하게 하였으므로 자기 가족만 챙기는 행위일 뿐 나눔이 아니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옛날은 가족의 범위가 지금보다 훨씬 넓어 한 마을 전체, 한 고장 전체에 한 성씨가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았다. 한 종족을 위한다는 것이 한 마을, 한 고장 전체를 살리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의장이 단지 자기 종족의 범위를 넘어서 그 고장의 다른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에 사용했다는 기록도 많으니, 의장을 민간의 나눔 전통의 하나로 보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01. 의장(義庄)을 실시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진 범중엄의 초상
02.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방관이 되어 청렴결백하게 선정을 베풀고 돌아와서는 방편을 마련하여 종족들을 넉넉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03.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부자댁 곳간채. 경주 최씨 가문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자산을 모으지 말도록 했으며,
       흉년에는 곳간을 잠그지 않았다고 한다.



의장의 본을 보인 조상들


   이런 의장의 예는 계속 이어져 조선시대 내내 여럿 발견된다.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말년에 의장을 마련하여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였다는 것이 알려져 있고, 조석기(曺錫基, 1830~1889)가 경남 창녕에 살면서 재물과 곡식을 희사하고 토지도 마련하여 의장을 만들어서 흉년에 구휼하는 데에 사용했다는 것이 『암서집』권20 「학음재의장기」에 나온다. 경남 고성에 살던 이한필(李漢弼, 1811~1894)이 의장을 마련하여 가난한 종족을 구제함은 물론 고종 13년(1896) 대흉년에 기민의 진휼에 힘쓴 공으로 부호군이 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면우집』 권156, 「부호군이공묘갈명」) 정약용은 『목민심서』 12부 「해관(解官)」에서 지방관이 되어 청렴결백하게 선정을 베풀고 돌아와서는 방편을 마련하여 종족들을 넉넉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면서 몇몇 예를 들었다. 윤광안(1757~1815)이 경상도 감사로 있다가 돌아와서 의장을 마련하여 종족들이 도움을 받도록 했다는 예가 거기에서 나온다. 어려울 때에 정부차원의 구휼제도를 논의하는 맥락에서 각 지방 누구누구의 의장의 예가 언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한 사람의 죽음을 맞아 그의 평생을 정리하는 행장이나 묘지명 등에 그가 의장을 설치하여 종족을 구휼하였다는 내용도 자주 언급된다.
    김제 지방의 부자 장석보(張石補, 1783~1844) 집안의 의장은 근래에 소개되었는데 현재까지 「장씨의장서(張氏義庄序)」 등 문중 기록까지 자세히 있어 좋은 자료이다. 장석보와 그의 네 아들이 힘써 치부를 한 후에 그 다음 대에 여덟 아들이 각기 출연하여 의장을 만들었다. 해마다 나이순으로 일 년 임기의 유사를 뽑아 집안의 제사며 각종 관리하는 일을 하게하고, 그 유사에게 삼사백석의 재산을 기증하여 김제군 서도리에서 해마다 한 사람의 부자가 탄생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장씨 형제들이 계속 마흔 석 정도의 쌀을 내어 충당하여 본래 의장의 규모도 줄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다는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현재 중앙고등학교 건립에 거액을 기부하고 『조선어사전』 편찬에 또 거액을 기부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던 인물 장현식(張鉉植, 1896~1950)이 바로 그 집안사람이다.



좌) 장현식고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며 사회사업가인 일송 장현식 선생이 건축한 한옥으로, 이 고택은 일제하 독립투사로 평생을 바친
       장현식 선생의 나눔과 섬김의 정신이 담긴 곳이다.
우) 겨울을 맞아 불우한 이웃을 위해 연탄을 배달하고 있는 봉사자들


소형육식공룡이 남긴 것으로 발자국의 크기는 길이 9~11cm, 폭 10~12cm 정도로 공룡발자국으로는 작은 편에 속한다. 이 발자국 화석은 울산에서 보고된 육식공룡발자국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으며, 보행렬이 인지되는 첫 사례이다. 이러한 발자국 화석들은 공룡이 생활하면서 남긴 흔적으로 공룡 골격(뼈) 화석과는 매우 다른 학술적 가치를 가진다. 공룡발자국을 통해 반구대 앞마당을 거닐었던 공룡은 어떤 종류의 공룡이었는지,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였으며 어떠한 행동을 하였는지,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었는지, 단독 혹은 집단생활을 하였는지 등 공룡의 서식환경과 습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정보를 알 수 있다.


가족 개념을 확산한 인 사상

    의장은 친족단위의 구제와 나눔 전통에서 시작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유교적인 정신사 속에서 친족단위의 구제는 사회 전체로 이어진다. 유교적인 맥락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인(仁)이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 인을 내부에서 외부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확산해 나가는 방식으로 가정의 일이 천하의 일로 이어진다. 내 마음의 중심을 다하는 것이라는 충(忠),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서(恕)라는 방식으로 인(仁)이 천하로 이어지는 것이다. 내가 내 가족을 생각하고 대하는 방식으로 우리 고장을 생각하고 대하고, 우리 고장을 생각하고 대하는 것을 미루어 다른 고장을 생각하게 될 때 결국 온 나라를 붙들 수 있게 되는 방식이다.
한국인은 사회적 기부보다 개인의 연결망 안에서 나누는 특징이 있다면서 이를 두고 기부의 전근대성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국가나 기관, 제도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 현대사회 기부의 올바른 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서구 중심의 기준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사회는 유교 사상의 영향 아래 가족 개념을 확산한 인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 그리고 근대에까지 의장은 인 사상의 확산을 기반으로 중앙 차원의 제도적 구휼이 손 닿지 않은 곳에서 공동체 차원의 구제와 협력으로 함께 살아간 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