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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고하고 웅대한 광경앞에서

2019-01-04

문화 문화놀이터


 




    이 산의 청고함과 웅대한 경승은 지리산에 버금가되, 세상에서 미투리와 대지팡이를 갖추어 등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두류산과 가야산을 언급할 뿐 이 산을 일컫지는 않는다.
    애당초 이 산이 볼만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사물이란 저절로 존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존귀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적절한 사람을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 하는 것이 어찌 산에 중요한 문제이랴. 진실로 산의 승경을 보아 마음에 얻는 바가 있다면 어찌 반드시 남의 끼친 자취에 의존할 필요가 있으랴. 세상에서 그저 남의 자취를 따를 뿐이고 산의 승경은 버려두는 것은 잘못이다.






임훈이 사랑한 덕유산

    덕유산 향적봉(1,614m)을 1552년(명종 7)에 유람한 임훈(林薰, 1500~1584)이 남긴 글의 일부이다. 지금은 눈꽃산행으로 겨울 등산객이 제일 많이 찾는 산이지만, 당시에는 유람한 이들이 없었다. 임훈은 추석이 막 지난 음력 8월 24일부터 29일까지 5박6일에 걸쳐 덕유산의 일출과 일몰, 향림의 경치를 만끽했다. 그리고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葛溪里)의 자이당(自怡堂)에서 「덕유산 향적봉 등정기(登德裕山香積峯記)」를 작성하였다. 산을 유람하고 노정과 감상을 서술한 이 유산기 양식의 글에서 그는 부동의 산 모습과 돌변하는 구름의 변화를 대비시켜 보았다.
    임훈이 눈꽃 핀 능선에 올랐다면, 산과 구름의 대비 구도를 어떻게 수정할까? 하지만 500년 뒤의 덕유산 풍광도 그의 말 그대로다. 눈꽃 핀 능선을 건너가는 구름들이 일대의 산을 가렸다가 토해 놓고, 다시 가렸다가를 반복한다. 덕유산은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에 위치한다. 주산 향적봉은 두문산, 칠봉, 거칠봉 등 높은 봉우리를 거느린 웅장한 모습이다. 향적봉에 오르면 북으로 적상산을 아래로 두고 멀리 황악산과 계룡산이 보이며, 서쪽으로 운장산과 대둔산이, 남쪽으로 남덕유를 앞에 두고 지리산과 반야봉이 보이며, 동쪽으로는 가야산과 금오산이 보인다. 영남과 호남을 가르는 이 산은 임훈에게는 고향의 진산이자, 집 뒷산이었다.



01. 온통 눈꽃과 상고대로 감싸인 등산로   02. 덕유산 향적봉의 아름다운 설경   03. 능선의 주목과 구상나무 군락

    임훈은 경상도 안음에 기반을 구축한 사림파 지식인으로 아우 임운(林芸)과 함께 효성이 지극하다고 알려져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명종 때 육현(六賢)의 한 사람으로 천거된 인물이다. 어릴 때 덕유산의 산방으로 가서 글을 읽은 이후, 한 번도 산 아래를 떠난 적이 없었다. 임훈은 아우 임운과 함께 정여창(鄭汝昌)의 학문을 사숙하여 산림에서 수양을 쌓았으며, 조식(曺植)과 교유하면서 정치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뜻을 품었다. 하지만 1540년 생원시에 합격했을 뿐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1567년 언양 현감을 지냈고, 1582년 장예원판결사에 임명됐으나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서당을 열었다. 이 서당은 경상우도의 학문 전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향적봉에서 기리는 넓고 깊은 시야


    28일 임훈은 지봉(池峯)에 올랐다가 저녁에 탁곡암(卓谷菴)으로 갔다가, 29일 하산하였다. 임훈은 덕유산의 맑고 웅대한 기상을 사랑했다. 당시 명사들의 발걸음이 덕유산에 이르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되, 산의 유람은 스스로 새로운 경관을 발견하여 자기 마음에 얻는 바가 있다면 족하다고 하였다.
    임훈 이후로 여러 사람들이 덕유산을 사랑하게 되었다. 정온(鄭蘊, 1569∼1641)은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를 주장 하다가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하자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에 들어가서 5년 뒤에 죽었다. 허목(許穆, 1595∼1682)은 23세 되던 1617년(광해군 9) 부친의 임지인 거창(居昌)에 있으면서 덕유산을 유람하고 『덕유산기』를 지었다. 그리고 성주(星州)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으며, 그로써 남인의 학맥을 확고하게 하였다. 또한 이만부(李萬敷, 1664~1732)는 무풍(무주)의 상산(적상산)으로부터 덕유산 동쪽까지 유람하고 『삼동기(三洞記)』를 지었다.




1566년(명종 21) 전국에 기상이변이 있자 명종은 뇌물의 횡행, 수령의 약탈, 백성의 위무와 안집, 부역의 균등이 시행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그 시정 방안을 널리 구하였다. 1567년(명종 22) 언양현감으로 있던 임훈은 민본사상을 토대로 하여 백성이 튼튼해야 나라가 튼튼할 수 있다는 대민관을 제시하였다.
임훈은 백성에 대한 착취와 부역을 그치게 하여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시야는 넓고 깊었다. 그것은 그가 평소 사물을 깊고 넓게 보아왔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임훈은 덕유산 향적봉에 올라보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거처하는 곳이 높으면 바라보는 곳이 먼 법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