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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다란 선에 담긴 깊은 울림 그리고 힘

2019-01-18

문화 문화놀이터


가느다란 선에 담긴 깊은 울림 그리고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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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슥슥슥, 0.1mm 가느다란 펜촉이 화지를 빠르게 오갔다. 펜촉을 쥔 김영택 화백의 손끝엔 그 어떤 떨림도 없었다. 모든 힘이 손끝에, 펜촉 끝에 모여 어긋남 없는 선을 그려냈다.
    수십여 차례 빠른 손놀림이 이어지자 어느 건축물의 외벽 한 귀퉁이가 조금씩 제 형상을 갖췄다. 선 하나의 존재는 미미한데 수십만 번의 선이 모이니 어떻게 이렇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일까. 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펜화는 나의 운명

    어렸을 때부터 세밀한 묘사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소년이 있었다. 그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종이에 지폐를 그려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깜빡 속았다. 실제 사용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년의 장난을 알게 된 아버지는 소년을 호되게 꾸짖었다. 해서는 안 될 장난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첫 미술시간, 소년의 스케치를 본 미술선생은 “미대 학생보다 더 스케치를 잘한다.”며 극찬을 했다. 소년은 그런 재주로 그림을 배우고, 디자인을 전공해 산업 디자이너가 되었다.
청년이 된 그는 국내에 내로라하는 기업과 광고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큰 인정을 받았다. 그 이후에는 홍인디자인그룹을 세워 20년 동안 경영했다. 그야말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 성공의 절정은 1993년에 찾아왔다. 국제디자인단체인 ITC(International Trademark Center)가 전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디자인 앰버서더’ 54명 중 한 명에 선정된 것이다.
운명은 그 다음해에 찾아왔다. ITC 주최로 제1회 세계디자인 비엔날레가 벨기에 오스탕트에서 열렸는데, 초대작가로 벨기에로 가면서 프랑스 파리에 들렀다. 루브르박물관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프랑스의 화가이자 삽화가인 귀스타프 도레(1832~1883)가 펜화로 그린 그림성서를 보았다. 그는 그 작품 앞에서 발을 뗄 수 없었다. 한순간에 매료됐다. 소위 ‘잘나가는’ 디자이너였던 그는, 그렇게 펜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김영택 화백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운명의 초입에 섰을 때, 그 어떤 내적갈등도 없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그의 결심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단다. “귀스타프 도레의 펜화를 보자마자 ‘아, 이거다!’라고 외쳤어요. 내가 우리 건축 문화재를 펜화로 남긴다면 그 자체가 기록화로서의 가치가 인정되고, 여러 방면에서 활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의뢰를 받아 남을 위해 작업하는 디자인이라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에 ‘내 이름으로 된 결과물’을 남기고 싶었던 것도 펜화가로의 전환에 영향을 끼쳤죠.” 그가 그린 건축 문화재는 이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문화재청은 2019년 달력을 김화백의 ‘한국의 누각과 정자’로 만들었다.


무아(無我)의 힘으로 긋는 수십만 번의 선


   많고도 많은 문화재 중에서 김영택 화백이 ‘건축 문화재’를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의 컬렉터 기질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관심이 가는 분야에 대해서 독학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실에는 건축, 카메라, 고문화재에 대한 자료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이러한 배움이 펜화가로 전환하는 데에 굉장한 도움이 됐어요. 중학생 때 건축설계를 독학했고, 친구네 집 카메라를 빌려 사진을 공부했어요. 대학교 졸업할 때쯤에는 고문화재에 빠져 조선백자와 가구들을 사 모았고, 고문화재 서적과 자료를 수집 했습니다.”
    펜화 또한 독학으로 시작했다. 펜화는 그가 평생 동안 습득한 지식과 재능이 총동원됐다. 인간 김영택 삶의 결정체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그의 온 삶이 담겼다. “디자이너가 됐을 때도 세계 정상의 디자이너가 되자는 꿈을 꿨고 또 이뤄냈어요. 펜화가로 전환하고도 세계적인 펜화가가 되자는 목표를 세웠지요. 나이 50세에 세계적인 펜화가가 되려는 욕심을 부린 건데, 남의 걸 보고 베끼면 아류 이상은 안 되니까 독창적인 길을 가면 이룰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의식적으로 다른 작가의 펜화 작품을 안 보려고 했고, 나만의 펜화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가 ‘김영택 펜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김영택 원근법’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화법 때문이다. 이것은 서양화의 원근법과는 크게 다르다. “우리 눈의 망막 중심에 작은 부분의 고해상도 망막세포가 있고, 그 주변은 저해상도 세포가 있죠. 그래서 풍경을 보면 한 장의 이미지로 보는 게 아니라 이곳저곳 훑어본 후 전체를 덩어리로 기억해요. 먼 곳의 사물도 특이하면 크게 봅니다. 서양 원근법이나 카메라와는 달라요. 그래서 눈으로 풍경을 보았을 때와 그것을 카메라로 담은 후 사진을 보았을 때 감흥이 달라지죠.” 김영택 화백은 눈으로 보았을 때의 감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그리고자 하는 대상물의 비율을 의도적으로 조정했다.



01. 선 하나의 존재는 미미하지만 수십만 번의 선이 모이면 강한 울림을 준다. 
02. 화지를 빠르게 오가는 가느다란 펜촉. 하지만 펜촉을 쥔 김영택 화백의 손끝엔 작은 떨림도 없었다.
03. 김영택 화백은 0.1mm의 펜촉으로 50~70만 번 선을 그려 대상을 표현한다.
04. 김영택 화백은 수많은 소재중에서도 문화재를, 그중에서도 ‘건축 문화재’를 주로 그린다.


그래서일까? 그의 펜화를 보고 있노라면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정확하기로는 사진을 따라갈 수 없는 게 분명한데, 오히려 그의 그림이 더 실제 같다. 물론 아주 가느다란 펜촉으로 50~70만 번 선을 그려 표현해낸 세밀함도 한 몫 하겠지만, 그만의 화법은 무언가 다르다. 깊이가 있고 품격이 있다. 부드러우면서 강한 힘이 느껴진다.
“0.1mm 선 하나는 아주 미미한 존재죠. 하지만 그게 수십만 번 모이고 또 모이면 사물이 되고 무게가 생겨요. 그리고 힘이 실리죠. 더 중요한 건 사물의 혼백이 담길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노력하는 것은 예쁘게 그리자, 잘 그리자가 아녜요. ‘의식하지 말자’라는 거예요. 아름답게 그리려는 욕심이 있으면 힘도 혼백도 담기지 않아요.”
김영택 화백은 우리 선조들은 무아의 미를 탁월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욕심 없는 순박한 마음으로 툭툭 만들어내는데, 그 속에서 우리의 미적 특성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그 자체의 무의식적 행위에 어떤 욕심도 담지 않을 때,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이 발현되는 것이죠.” 김영택 화백 또한 선을 긋는 행위를 함에 있어 어떤 욕심도 넣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아(無我)의 힘으로 긋는 수십만 번의 선

펜화는 서양에서 수천 년간 기록수단으로 발달한 화법이다. 인쇄술이 발달하여 신문과 잡지가 제작되면서 펜화는 전성기에 도달했다. 하지만 카메라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쇠퇴하여, 지금은 서양에서도 기록수단으로의 펜화는 명맥이 끊겼다. 2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펜화는 낯선 장르였는데, 김영택 화백 덕분에 펜화가 제법 알려졌다. 최근에는 도쿄에서 일본과 세계 건축문화재 펜화로 전시회를 열어, 세계로 도약하기 위한 첫 걸음을 뗐다. “저는 앞으로 한국과 전 세계의 중요 건축 문화재를 최대한 담아내려고 하며, 이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펜화미술관을 건립하려고 합니다. 저는 ‘김영택 화법’이 전 세계에 기록펜화를 새로운 미술장르로 재탄생시키리라고 확신합니다.”
사포로 얇게 갈아낸 펜촉, 그리고 새하얀 화지, 새까만 먹물. 김영택 화백은 하나의 작품을 그려내기 위해 몇 개월의 시간 동안 50~70만 번의 선을 긋는다. 선이 모여 그림이 되고 그 안에 힘이 깃든다. 올곧은 정신이 스며든다. 그렇게 하나의 예술작품이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