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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신분질서, 반상의 구분을 허무는 축제

2019-02-08

문화 문화놀이터

문화재사랑

막힘속의 통함
엄격한 신분질서, 반상의 구분을 허무는 축제
'임형규 국가무형문화재'


   익살스러운 표정과 재담으로 풀어내는 해학과 풍자.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마을 수호신인 서낭신에게 지내는 제사이자 삶의 시름을 떨쳐버리는 축제였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서낭당에 모여 굿판을 펼쳤고 국신당과 삼신당을 거쳐 옛 동사 앞마당에 이르러 탈놀이를 시작했다. 별신굿은 강신, 오신, 송신의 구조로 진행되며 탈놀이는그중에서 오신에 해당된다. 즉 신을 즐겁게 해드림으로써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으려는 것이다. 무동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과 선비마당까지 탈놀이 여섯 마당은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온 마을을 무대 삼아 펼쳐졌다. 높낮이도 경계도 없는 열린 무대에서 양반과 천민구분 없이 어울리며 노래와 춤으로 대화했다.
 




스무살에 마주한 예인의 운명

    생각해보면 그저 젊은 혈기였다. 지금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스무 살의 임형규 보유자는 안동탈놀이 맥 찾기에 뛰어들었다.
“안동에서 태어나고 쭉 안동에서 자랐어요. 어려서부터 공부는 열심히 안 하고 낚시니 등산이니 노는 데에만 열심이었죠. 한동안 연극도 했고요. 그런데 스무 살무렵에 안동에서 ‘우리 문화 찾기 운동’이 일어났고 저또한 안동 고유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렇게 그 일에 뛰어들게 된 겁니다. 청춘을 다 쏟았죠.”
    일제강점기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 단절되어버린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존재를 맞닥뜨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학계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시민들 손으로 해보자며 몇몇 젊은이들이 뜻을 모았고 그렇게 안동하회 가면극연구회가 만들어졌다. 그 중심에 임형규 보유자도 있었다.
    안동하회가면극연구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승자를 찾는 것이었다.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찾아나서 보니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였다. “하회마을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다 돌아다녔어요. 전승자를 찾아야만 기록을 남길 수 있으니까요. 그 당시엔 안동시내에 다니는 버스가 한 대뿐이었는데, 그걸 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아다니면서 수소문했죠. 엄청 고생했어요” 수개월 만에 찾은 전승자가 바로 1980년 하회별신 굿탈놀이 초대 보유자로 인정된 이창희 선생이다.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그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재수라는 이름으로 한참 찾아다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재수는 아명이고 본명은 이창희였어요. ‘상놈’이라는 신분이 드러날까 봐 자식들이 아버지의 정체를 숨겨왔더군요. 아버지는 탈놀이를 한 적도 없고 하회마을에 산 적도 없다고 말이에요.” 몇 달 동안 설득한 끝에 선생과 가족의 허락을 받아냈고 영영 사장될 뻔했던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채록이 이루어졌다. 채록한 것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경상북도에 제출하고 곧이어 합숙에 들어갔다. 안동하회가면극연구회 회원들은 차도 다니지 않는 외딴 마을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150일 동안 합숙하며 이창희 선생에게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배웠다. 잠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 온종일 연습에 매진하는 강행군이었다. 150일 뒤 드디어 민속위원들을 안동에 초청해 그 결과물을 선보였고 평가는 기대 이상이었다.

 


01~02. 하회탈은 코와 눈, 주름살이 잘 조화되도록 제작돼 비록 한 면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 표현해낼 수 있다.
03. 대중들이 하회탈의 우수성을, 그리고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담긴 우리민족의 생각과 정서를 이해하길 바라는 임형규 예능보유자



회의를 딛고 더 굳건해진 의지


  보고서 내는 것이 목표였지만 보고서만으로 끝낼 수 없었다. 이어갈 사람이 필요했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뿌리를 겨우 찾아냈지만 그것을 이어가는 일은 더더욱 어렵더군요. 매일 회원을 모집하러 다녔는데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참 힘들었죠. 부모님들의 반대도 정말 심했고요. 탈춤을 그만두지 않으면 족보에서 빼겠다고 엄포 놓는 분들도 계셨으니까요. 그래도 동료들하고 저녁에 막걸리 한잔하며 풀어버리고 다시 힘을 냈답니다.” 전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며 회원을 모집했고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꾸준히 배우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때 회의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그들 때문에 다른 길을 갈 수 없었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탈놀이에 미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더라고요. 그때가 마흔 무렵이었는데 내 청춘은 다 어니 갔나, 허무하더군요. 다 치우고 이제 장가도 가고 돈도 벌어보자 싶었던 거예요. 그때 주변 사람들의 격려가 저를 붙잡아 줬어요. 전통문화를 살려내 세상의 빛을 보게 하는 일을 누가 하겠냐면서요.” 그를 지금까지 이끌어준 것은 힘을 북돋아주는 사람들, 그리고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대한 애정이었다.
    “탈놀이 이전에 먼저 탈에 반했어요. 탈을 연구하다 보니 어떻게 이런 탈을 창조했을까, 조상의 창의성에 놀라게 된 거예요. 해외의 탈들은 추상적으로 만들어져서 표정 변화가 없지만 우리 탈은 사람의 얼굴처럼 표정을 전달할 수 있죠. 비록 나무 조각이지만 쓰면 살아있는 얼굴이 돼요. 그게 바로 탈의 매력입니다.” 하회탈의 특징은 코와 눈, 주름살이 잘 조화되도록 제작돼 비록한 면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다. 턱을 들면 밝고 유쾌한 표정이 되고, 내리면 화난 표정이 된다. 보는 방향에 따라 표정이 다르다. 또 턱을 분리해 제작함으로써 대사 전달이 분명하며 말을 할 때마다 턱이 움직여 표정의 변화를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다.
   그는 대중들이, 특히 안동 사람들이 이러한 하회탈의 우수성을, 그리고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담긴 우리민족의 생각과 정서를 이해하길 바란다. 그것은 세계인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와 이념을 정립하는 일이기도 하다. 반상이 엄격히 구분된 신분사회에서 탈놀이를 통해 실현했던 ‘소통의 문화’도 모두가 알아야 할 우리민족의 모습 중 하나이다.



엄격한 신분사회속 파격적인소통

    “하회별신굿탈놀이에만 있는 탈이 백정탈입니다. 극 중에서 백정은 ‘저놈의 소새끼 불알이 크다 해서 뚝 따 묵으마 양기에 억시게 좋을시더’ 하며 양반을 조롱하죠. 탈놀이 기간만큼은 소작농으로 일하면서 양반들에게 쌓아왔던 울분을 마음껏 분출하고 학대하던 양반들을 조롱해도 처벌받지 않았죠. 탈놀이는 양반, 천민 구별없이 모두가 함께 즐기는 문화였습니다.” 하회별신굿탈 놀이는 평등한 세상을 바라는 민중들의 부르짖음이었다. 별신굿 기간에는 양반과 상민, 부자와 빈자로 나누어진 사회 틀 속 억눌림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별신굿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기간 동안만이라도 없는 자, 눌린 자들이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자기들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었다. 비록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그들에게는 자유를 누리며 평등한 세상에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열린 세계였다.
    “사람들이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담긴 정신과 가치를 알고, 그 관심과 지원을 바탕으로 마음 놓고 연희를 할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하지만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이죠. 너무 안타깝습니다.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새롭게 조명되어서 뜻있는 사람들이 그 맥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통문화는 한시대에 끝나면 안 되니까요.” 죽는 날까지 탈을 쓰고 무대에 서겠다는 임형규 예능보유자.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어’ 시작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맥 잇기는 온전히 그의 인생이 되었다. 임형규 예능보유자는 그 길을 이어나갈 뜻있는 사람들을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글. 성혜경 사진. 김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