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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201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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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가 숨겨둔 보물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마터2형 10호 증기기관차'

    문화는 드러나 있어야 그 가치를 얻을 수 있다.1950년 12월 31일 동족 간 피를 흘리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자유와 평화를 위해 북진하고 있던 연합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부득불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평양에 쌓아두었던 군수물자를 실어오기 위한 작전이 진행되었다. 마터2형 10호 증기기관차는 화차 25량을 달고 평양을 향해 달렸다. 장단역을 지나 한포역에 이르자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마는 뒤돌아서야 했다. 남행하라는 명령에 의해 증기기관차는 다시 장단역에 멈췄다.
연합군은 증기기관차가 더 남하를 할 수 없음을 알고 탄환을 날려 증기기관차로서의 생명줄을 끊었다. 뒤따라온 인민군은 25량의 화차를 북으로 가져가다 화통을 폭파하여 철로에서 이탈시켰다. 그 후로 50년의 세월이 지났다. 잡초에 묻혀 있던 증기기관차는 등록문화재 제78호로 임진각에서 처참하고 처절한 모습으로 자유와 평화, 그리고 통일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개성역에서 황해도 한포역까지 올라갔다 전세가 악화되어 남쪽으로 내려오던중 1950.12.31
밤늦게 경의선 장단역에서 피폭되어 탈선하여 그 자리에 멈춰선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한국 철도의 시작
    증기기관차가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 산업의 발전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철도는 신식문물로 근대화의 상징이다. 하지만 재정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현실은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철도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서울과 인천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 철도가 논의되면서 부설권이 탁상 위에 올려졌다. 미국의 모스와 일본이 저울질하였지만, 조정은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철도 부설권은 결국 일본에 넘어갔다. 뒤를 이어 경부선과 경의선까지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한국 철도는 일본의 영향하에 산업의 기반시설이 시작되었다. 이것을 둘러싼 열강의 갈등과 대립은 결국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용산에서 의주 사이의 군용철도 부설을 위한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府)를 설치하여, 일본 군대에 의해 군용철도를 부설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자행은 극에 달했다. 토지와 노동력의 수탈이 가혹하여 한국인의 반철도항일투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6년 4월 3일 용산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었고, 같은 해 9월 1일 관리권이 군용철도에서 통감부 철도관리국으로 이관되었다. 1908년 4월 1일 부산과 신의주를 직통하는 급행열차인 융희호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경의선을 용산에서 신의주까지만 운행할 욕심이 아니었다. 1911년 압록강 철교를 가설하고, 만주철도를 경의선과 같은 표준궤도를 개축하여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가 펑텐(奉川), 창춘(長春)까지 달릴 수 있도록 하였다. 1930년대에는 일본의 세력 범위가 중국 본토로 확대되고 경의선을 통해 서울에서 베이징 사이에도 직통열차를 운행했다. 국제 연락 운수도 활발하여, 서울에서는 경의선과 만주철도, 시베리아철도를 거쳐 영국 런던까지 갈 수 있는 열차표가 판매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경의선은 38선 이남에 있는 서울에서 개성 사이의 74.8㎞ 구간에서만 단축 운행되었으며, 1951년 6월 12일 운영이 중단되었다.

 
좌) 비와 눈을 막을 수 있도록 보호각 등을 설치한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우) 현재는 화통만 남아 있는 상태로 현재 임진각에서 보존 중인 마터2형 10호 증기기관차
 
증기기관차의 도입과 운행
   철도가 놓이고 물류를 수송하는 열차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모가형 증기기관차가 1899년 경인선에 최초로 달리기 시작하고 뒤이어 경부선에도 증기기관차가 도입되면서 다양한 종류의 증기기관차가 철도를 누비며 달렸다. 1919년 화물용으로 도입된 증기기관차 중에 미카 3-129가 있다. 6.25 전쟁 당시 피난민과 물자를 실어 나르며 전국을 달렸던 기관차이다. 1920년경 이후부터는 자체적으로 증기기관차를 조립 생산하면서 고성능화 및 급행열차 운행이 급속도로 본격화되었다. 파시형 증기기관차, 미카형 증기기관차의 등장으로 대형화되면서 전국으로 뻗어 있는 노선에 속속 투입되었다.
경의선에도 1906년 4월에 도입된 일본 가와사키사가 제작한 길이 15m, 폭 3.5m, 높이 4m의 80t 중량의 마터2형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 최초 사륜 탱크형 증기기관차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 기관차는 미국으로부터 당시 일본군의 군용 철도차량으로 도입한 것이다. 그 후 경의선에는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마터형 증기기관차가 운행되었다. 산악 지형의 효율적인 화물수송을 위해 도입된 이 기관차는 이름도 산악형이라는 의미에서 산(Mountain)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첫 두 음절을 따서 ‘마터’라고 하였다. 북한 지역에서 주로 화물 및 여객 경인용으로 운행되었으며, 남한에서도 화물 및 여객수송에 투입되어 한국철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증기기관차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많은 증기기관차는 6.25 한국 전쟁에 투입되어 철로를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활약을 했다.

 
마터2형-10호 증기기관차의 최후
    경의선을 달리던 증기기관차 중에 전쟁의 상흔을 안고 갈 길을 멈추고 눈에서 사라졌던 마터2형-10호이다. 휴전선이 생기면서 그 존재가치를 잃어버린 증기 기관차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쳤으나 오랜 세월 동안 잡초에 쌓여 흔적을 감추려 했다. 마터2형 10호는 현대의 처리방법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임진각 독개다리 입구이다.
 
좌) 파주 경의선 장단역 죽음의 다리는 장단에서 연천의 고랑포로 나가는 유일한 국도 교량으로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건립하였다.
우)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검붉게 녹슬고 부식된 채로 반세기 넘게 비무장지대 안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문화재청은 이를 남북분단의 뼈아픈
      역사적 상징물로 보호·관리하기 위해 등록문화재로 등록하였다.

    마터2형 10호는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혹한의 추위가 오던 날인 12월 31일 연합군의 군수 물자를 평양으로 가서 싣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북상하던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밀리고 있었다. 이 때 평양으로 가던 열차는 평산군 금암면 한포리 한포역에 이르러 북쪽 전황이 좋지 않으니 즉시 남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울로 되돌아 오던 중이었다. 밤 10시쯤 지금의 비무장지대(DMZ)에 있던 장단역에 도착하여 기관사 한준기(당시 23세)가 기관차에서 벗어날 무렵, 연합군에 의해 증기기관차에 총탄이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1,020여 발의 탄알이 날아들면서 기관차는 더는 움직일 수 없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인민군은 증기기관차가 움직이지 못하자 화차 25량을 가져가면서 화통을 폭파해 증기기관차는 선로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선로를 벗어난 증기기관차는 종전되면서 휴전선이라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 갇히게 되었다. 누구도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던 증기기관차는 비바람, 눈보라, 그리고 초본과 목본식물에 깊이 잠들고 말았다.
이대로 볼 수만 없었던 우리는 지난 2000년에 개최된 남북 정상회담에서 경의선 복원에 합의하면서 수풀에 잠들어 있던 마터2형 10호 증기기관차 화통이 눈에 들어왔다. 마터2형 10호는 분단의 아픔을 보여주고 앞으로 다가올 평화의 그날을 앞당겨줄 소중한 가치를 지닌 상징물로 등록문화재 제78호로 등록하였다.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한 끝에 ㈜포스코의 기술을 동원하여 정밀조사하여 최적의 처리방안을 수립하였다. 녹 제거, 부식방지 처리, 재부식 예방조치 등의 과정을 거쳐 2009년 6월 25일 경기관광공사는 많은 국민이 동족상쟁의 아픔을 볼 수 있도록 지금의 자리에 이전하여 공개하게 되었다. 비와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게 지붕을 만들고 그 아래 자리를 잡은 마터2형 10호 증기기관차는 외관상 어느 하나 온전한 곳이 없다. 1,020개의 탄알이 뚫고 들어간 곳은 벌집과도 같고 화통의 외관은 갈기갈기 찢기고 구겨 있다. 이것이 동족 간의 아픈 상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