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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과 폐쇄된 간이역

201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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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과 폐쇄된 간이역
'경기도 양평 구 구둔역'

    첫사랑이 애틋한 건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되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련한 첫사랑을 다시 떠올려보기 좋은 곳이 있다.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구둔역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수지)과 승민(이제훈)이 처음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던 날. 그러니까 그들의 첫사랑이 과실을 맺은 곳이다. 영화에서 승민과 서연은 철로 위를 나란히 위태롭게 걸으며 데이트를 즐긴다. 이 풋풋한 걸음은 첫 데이트의 설렘과 긴장감,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는 애틋한 상황을 잘 표현한 장면으로 <건축학개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서연은 승민에게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들의 관계는 한 단계 발전하게 된다. 이어 둘은 손을 잡고 철로 위를 안정적으로 걸어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추억으로만 남는 첫사랑처럼 구둔역 또한 과거의 흔적만 유지한 채 현재는 운영을 하지 않는 간이역이 되었다. 더 이상 열차는 오가지 않지만 승민과 서연이 걷던 당시의 철로, 역사, 느티나무는 그대로 남아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01.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수지)과 승민(이제훈)은 철로 위를 나란히 위태롭게 걸으며 데이트를 즐긴다.
02. 양평 구 구둔역 철로 변에는 시간을 세워놓은 듯 전동차 한 대가 서 있다.
 
소박한 시골 풍경

    이런 곳에 기차역이 있을까? 구둔역은 한적한 시골마을에 위치한다. 정확히는 양평군 일신리에 있다. 강자락을 따라 걷다 보면 작은 들녘이 나오고, 논밭 옆으로는 차 한 대만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시골길이 펼쳐진다. 시골길 따라 늘어선 집들도 정겹기만 하다. 마당이 보이고, 이따금 감나무도 눈에 들어온다. 시골길을 걷다 보면 이내 도시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평화로운 시골의 정서가 마음에 새겨진다. 서연과 승민의 데이트가 이루어진 것도 시골마을의 정서가 한몫했으리라. 조용한 시골 마을 사이 언덕 위에는 작은 성처럼 자리한 간이역이 보인다. 바로 구둔역이다. 역전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구둔역이 역사의 기능을 상실한 건 일신역이 개통된 2012년 8월 16일부터다. 일신역은 중앙선으로 이용객이 적어 무배차 간이역으로 운영되고 있다. 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이라 기차역은 있지만 붐비지는 않는다. 언제나 한산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구둔역이 한창 붐비던 시절에는 청량리에서 열차를 탄 사람들이 태백이나 강릉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중요한 역사였다. 구둔역은 1940년 4월 1일 보통역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과거 간이역의 전형적 구조인 장방면 평면에 ‘T’자형 지붕을 얹은 형태다. 출입구는 박공형태다. 철로 방향에는 차양지붕을 달았고, 튀어나온 조정실 지붕은 작은 박공지붕이며 아직까지 그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에 건설되어 일본 시골 마을의 간이역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건축미와 감성을 느껴볼 수 있다.
개통 이후 보통 역으로 꾸준히 애용되었던 구둔역은 세월이 지나 고속도로와 고속철로 등이 생기며 이용객이 줄어들었다. 결국 2000년대 초 무궁화호가 하루 세 번 정차하는 간이역이 되었고, 일신역이 들어서며 그 기능을 마감했다. 더 이상 열차는 오지 않지만 1940년대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유지하여 2006년 12월 4일에 등록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01.양평 구 구둔역은 1동, 1층 규모로 건축면적은 95.2㎡이다.
02. 역 내부는 여느 간이역의 대합실과 같은 모습이다. 기증받은 커다란 거울과 벤치가 그대로 있고 열차시간표와 여객운임표에는
       과거 열차들의 운행 시간이 적혀 있다.
03. 열차시간표는 이제 소용이 없게 되었지만 역사 내 담벼락에는 구둔역을 지나쳐 간 마지막 열차의 운행 정보가 새겨져 있다.
 
시간이 멈춘 간이역

    폐역이 된 구둔역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문화재로 지정된 구둔역은 외관과 내부 그리고 철로까지 모두 예전의 흔적을 모두 보존하고 있다. 구둔역 내부는 여느 간이역의 대합실과 같은 모습이다. 기증받은 커다란 거울, 열차를 기다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소담소담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 같은 벤치가 그대로 있다. 오래 앉았던 흔적이 정겹게 느껴진다. 벽 한켠에는 과거 열차가 달리던 모습의 그림이 걸려 있고, 이마저도 옛날 사진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커다란 열차시간표와 여객운임표에는 별다른 장식 없이 과거 열차들의 운행 시간이 적혀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무궁화호가 달려올 것 같은 모습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빼곡히 적힌 방문객들의 낙서다. 폐역에서는 그렇게 나름의 시간이 흘러간다. 고개를 들면 오래된 목조 천장의 위용에 감탄이 나온다. 오래된 목재들이 단단하게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천장을 올려다보았을까 가늠해본다. 개통 당시 대합실을 방문했던 갓난아이도 이제는 노인이 되었을 테니 천장이 보고 들은 것이 얼마나 많을지 헤아릴 수가 없다. 열차표를 팔던 창구는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출출하다면 열차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커피를 즐겨도 좋겠다.
    대합실을 빠져나와 플랫폼으로 향하면 과거 운행되었던 열차가 전시되어 있다. 열차 내부에는 입장할 수 없어 외부만 둘러봐야 한다. 열차에 탑승하는 플랫폼에는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들이 설치되어 있다. 간이역의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자리다. 봄이면 철로 주변으로 개나리가 가득 피고, 가을이면 은행으로 노랗게 물드니 철마다 다른 영감을 받을 수 있겠다.


 
구둔역에서 체험할 것들

    구둔역에 가면 반드시 체험해봐야 할 것들이 있다. 먼저 <건축학개론>에서 서연과 승민이 손잡고 걸던 철로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다. 영화 속 장면처럼 두 팔을 벌리고 철로 위에서 균형을 잡는 재미도 경험하길 권한다. 서연과 승민의 위태로운 감정과 설렘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철로에서 균형을 잡았을 즈음 연인의 손을 잡고 5분 정도 걷다 보면 어느새 끊긴 철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럼 자갈길을 걸어 되돌아가거나 개나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첫사랑의 아련함이 남아 있는 구둔역에 갈 땐 편지를 준비해야 한다. 플랫폼의 커다란 향나무는 현재 소원나무로 활용되고 있다. 향나무에 방문객들의 소원이 담긴 카드가 과실처럼 매달려 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나무라고 했으니 그 아련한 첫사랑의 행복을 빌어보자. 그 마음 봉투에 담은 다음, 노끈으로 엮어 소원나무에 걸면 마음 한 곳이 가벼워지는 것도 같다. 정겨운 시골길을 지나 숨어 있는 오래된 간이역에서 시간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여운이 남아 있다면 첫사랑의 애틋함이 다시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구둔역의 시간은 첫사랑이 끝난 시점에서 멈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