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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한 우물…양복은 내 삶의 전부이자 즐거움

2019-04-09

문화 문화놀이터


한상권 2018 충청북도 명장(패션디자인)
45년 한 우물…양복은 내 삶의 전부이자 즐거움
'충북 최초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위촉'

    외과 의사였던 부친과 한복 바느질을 잘했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한상권(63) 패션디자인 명장. 부모님의 영향으로 유난히 손 기술이 좋았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연을 만들고 미술품을 조각하는 등 미술반에서 재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소아마비를 앓았던 한 명장은 사춘기 시절 방황도 하고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때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한 양복점이었다. 그곳에서 바느질을 배우고 45년 한 우물만 파 양복 테일러의 길을 걸어 2018년 충북도 명장에 선정됐다. 청주시 용암동에 위치한 마스터테일러를 운영하는 한 명장을 만났다. 바느질 할 때가 가장 좋다는 한 명장은 직접 제작한 말끔한 양복을 입고 취재진을 맞이했다. 한 명장은 ‘직접 만들어 입는 이것이 제 작업복’이라며 일할 때 입어도 편안한 100% 핸드메이드 양복을 뽐냈다.


 
충북도 명장이 된 소감은? 
평생을 기술자로 일해 얻은 것으로 명장이 됐다는 자부심과 만족을 느끼고 있다.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양복을 만들게 된 계기는?
소아마비를 앓아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때문에 일탈도 했었다. 그런 저를 어머니께서 양복점에 데려가 기술을 배우게 했고 양복 만드는 기술자의 길을 걷게 해주셨다. 당시 청주시 내덕동에 위치했던 큰 양복점에서 기술을 배우고 서울로 가서 또 배우고 다시 청주로 내려와 대림라사에서 15년간 또 기술을 익혔다.
 
봉사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양복 기술을 배우면서 꾸준히 봉사를 해왔다. 내가 받는 것보다 남을 돕는 것이 더 좋았다. 나도 장애인이지만 나보다 더한 장애인들을 위한 도움을 많이 주고 싶었다. 장애인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쳤고 장애인들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모르는 분들에게 많은 정보를 드리기도 했다. 또 군 단위 마을에 찾아가 봉사도 다니며 보람을 느꼈다.
 
마스터테일러를 운영하게 된 것은 얼마나 됐나?
청주시 용암동에서 마스터테일러로 일한지는 15년 됐다. ‘마스터 테일러’ 는 말 그대로 장인의 양복이다. 그런 만큼 장인정신으로 늘 옷을 만들어왔다. 저는 기술자 생활을 쭉 해오다가 뒤늦게 양복점을 차렸다. 기술자 출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만드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100% 핸드메이드의 명품 양복을 만드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지방에 살기 때문에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도 2위(은메달)에 머물렀다. 전시된 작품을 보고는 모두 내 작품이 더 좋다고 했을 때 속상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것이 현실인 것을. 또 3년 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떴을 때 가장 힘들었다.
 
맞춤양복만의 매력이라면?
편하고 맵시는 물론이고 품위가 있다. 사람마다 각각의 체형이 있는데 나만의 사이즈로 편안함을 준다.
 
후학양성과 대외적 활동이 궁금하다.
경북대 섬유공학과 학생과 대안학교 교사를 수제자로 가르치고 있다. 충북에서는 패션디자인 부문 처음으로 고용노동부 주관 섬유의복계열 현장 교수로 위촉됐다. 또한 청주교도소의 재소자를 대상으로 양복기술, 양복기능사시험 및 기능대회를 지도하고 있고 국가기술자격 심의의원, 한국맞춤양복협회에서 뛰어난 기술과 디자인으로 패션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돼 마스터테일러 굿 디자이너로 선정, 또 지난해 대만과 국제 양복 기술교류에도 참여했었다.
 
충청북도 명장으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나 계획은?
바느질 할 때 가장 편하고 기분이 좋다. 나이가 60이 넘었지만 다른 훌륭한 명장님들에게 지금도 기술을 배우러 다니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급하지 않게 꾸준히 지금처럼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앞으로 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바늘을 놓지 않을 것이다. 바느질은 내 삶의 전부이자 즐거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