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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시대 속 자주국가를 향한 희망

2019-04-19

문화 문화놀이터


암흑에 깃든 빛
암울한 시대 속 자주국가를 향한 희망
'대한민국 임시정부건국강령 초안'

    2019년 3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 전시회를 개최했다. 일제에 맞선 고난에 찬 투쟁의 흔적들이, 치열한 독립운동의 현장 곳곳에 전시됐다. 어느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유품이 있으랴만, 민주공화국 100년을 맞아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한문화재 앞에 섰다.
    등록문화재 제740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大韓民國 臨時政府 建國綱領草案). 붉은 테두리를 한 미색 종이 위에 또박 또박 손으로 써 내려간 문서의 처음 두 쪽이 전시되어 있다. 마치 인쇄라도 한 듯이 정갈하게 써 내려간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전율이 느껴지고, 쓰다가 틀려 고쳐 쓴 부분에서 글쓴이가 당장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01. 등록문화재 제740호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조소앙이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하여 독립운동과 건국의 방침 등을 정리한 문서이다.
02. 임시정부 요인들(뒤쪽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이석, 김구, 조성환, 송병조,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건국강령, 해방조국의 설계도
    一. 우리나라는 우리 민족의 반만년(半萬年) 래(來)로 공동(共同)한 언문(言文)과 국토(國土)와 주권(主權)과 경제(經濟)와 문화(文化)를 가지고 공동(共同)한 민족정기(民族正氣)를 길너온 우리끼리로서 형성(形成)하고 단결(團結)한 고정적 집단(固定的 集團)의 최고조직(最高組織)임
    二. 우리나라의 건국정신(建國情神)은 균평제도(均平制度)의 역사적 근거(歷史的 根據)를 두었으니 선민(先民)의 명명(明命)한 바 「수미균평위(首尾均平位)하야 흥방보태평(興邦保太平)하리라」하였다

    글을 쓴 때는 1941년 11월 어느 날. 일본의 침략이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해방의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몸으로 예감하던 때였다. 일생을 독립투쟁에 바쳤던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정세 변화를 민감하게 느꼈다.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조소앙, 박찬익, 차리석 등 당시 국무위원들은 우리 손으로 독립을 쟁취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중 하나가 건국강령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임시정부의 역사적 정통성은 어디 있는지, 어떻게 국토를 수복할 것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정부를 수립할 것인지, 해방된 조국에서는 어떤 정책을 펴나갈지 토론해서 정리하는 일이었다. 조소앙이 초안을 잡았고, 국무위원들이 함께 검토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28일 건국강령을 정식으로 공포했다.

 
(左) 국무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김구 선생        (右)1919년 4월 11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모두가 고루 잘 사는 나라를 꿈꾸며
    건국강령은 모두 3장으로 이루어졌다. 1장에서 국토를 수복하고 정부를 수립하는 대원칙을 천명했다. 2장은 일제와 싸워 나라를 되찾기까지 해야 할 일을, 그리고 3장에서는 정부수립을 위한 구체적 절차와 나라를 세운 뒤 실시할 주요 정책을 정리했다.
    건국강령에는 임시정부가 3·1운동의 연장선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4월 11일 13도 대표들에 의해 조직된 그 정부를 연면히 계승하였으며, 국가건설방향에 대한 치열한 토론 결과를 담은 삼균제도를 건국의 기본 방향으로 삼았음을 밝혔다. 1장에 인용된 1931년 4월의 선언은 읽을 때마다 감동적이다.
    보통선거제도를 실시하여 정권(政權)을 균(均)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하여 이권을 균(均)하고 공비교육으로써 학권(學權)을 균(均)하며 국내외에 대하여 민족자결의 권리를 보장해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와의 불평등을 혁제할지니 이로써 국내에 실현하면 특권계급이 곧 사라지고 소수 민족에 대한 침략·능욕을 면하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권리를 고르게 하여 높고 낮음이 없게 하고 동족과 이족에 대하야 또한 이러하게 한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체포와 고문, 죽음의 위협과 늘 대면하면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그들은 “누구든 차별 없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누구도 배곯지 않고 고루 잘 살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그런 국가를 꿈꾸었다.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균등사회를 실현하려는 꿈, 그들은 그런 꿈을 함께 꾸었기에 두려움과 고통을 피하지 않고 해방의 그날까지 그 길을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01. 2019년 3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 전시회를 개최했다
02. 임시정부 요인들(맨 앞줄 왼쪽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두 번째 줄 왼쪽부터 성주식, 김붕준,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03.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의 초안을 작성한 조소앙
 
 대한민국 헌법으로 이어지다
    건국강령은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인사들에게 두루 지지를 받았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탐구에 기초하고,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전개됐던 활발한 토론 결과를 두루 담았기 때문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됐다. 다양한 정치 세력이 여러 형태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고, 1948년 헌법은 이 초안들을 두루 펼쳐놓은 상태에서 준비됐다. 건국강령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건국 방침들도 중요한 검토 대상이 됐다.
    그리하여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는 건국강령에 담긴 균등사회 건설이란 취지가 뚜렷이 반영됐다. 헌법 전문에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함으로써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이룩하겠다고 썼다. 그리고 이 취지를 뒷받침할 조항을 여럿 담았다.
    민주공화제, 균등사회 실현을 지향했던 그때의 헌법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래서 다시 돌아보면, 그것은 100년 전 오늘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4월 11일 선포된 임시헌장의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으며,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모두 평등함”이었던 것이다. 100년 전 임시헌장이 건국강령을 경유하여 현재 헌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임시정부 100년, 새로운 100년
    3·1운동 100년, 임시정부수립 100년을 맞는 2019년 1월 2일, 문화재청은 조소앙의 손때가 묻은 건국강령 초안 필사본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이 문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 후 어떠한 국가를 세우려 했는지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로, 그가 고심하여 수정한 흔적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더욱 가치가 높다.”는 취지에서였다.
때마침 조소앙의 후손들은 1946년 조소앙의 연설을 디지털로 복원하여 공개했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와 처음 맞는 삼일절에 국민과 함께 나눈 연설이었다.
내 흙을 밟고 서게 되었습니다마는… 불우한 동포는 여러분 형제, 친구, 부형, 이들은 독립국과 자유민을 만들기 위하여 악독한 왜놈의 감옥에서 단두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원혼과 충혼을 위하여 나는 여러분 선열의 아내와 어버이와 언니와 아우에게 위로하며 사죄합니다. 이렇게 환국할 줄을 몰랐소, 그러나 다시 우리 산천초목, 금수어절에까지 고하고 맹세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주독립을 성공하리다. 아이마다 대학을 졸업하게 하오리다. 어른마다 투표하여 정치성 권리를 갖게 하오리다. 사람마다 우유 한 병씩 먹고 집 한 채씩 가지고 살게 하오리다.
    그의 연설과 함께 우리는 다시 100년 전 그날, 그리고 이국산천을 헤매면서 독립 민주와 균등사회 실현을 꿈꾸며 싸우던 이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꿈이 온전히 실현됐는지 돌아보고, 그들의 꿈을 나침반 삼아 새로운 100년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