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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하나 박지 않되, 견고하고 섬세한우리 가구

2019-05-03

문화 문화놀이터


완벽을 위한 너그러움
못 하나 박지 않되, 견고하고 섬세한우리 가구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기능보유자 박명배'

    집안 살림에 쓰는 책상이나 서랍장, 탁자 같은 것을 가구라 한다. 쓴다는 것은 쓰임새가 있다는 뜻이며, 그러기에 가구는 예술품이나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는 인식이 뿌리내려있다. 50여 년 소목장의 길을 걸어온 박명배 보유자는 생활도구가 아닌 작품의 가치를 지닌 가구를 지어왔다. 전통의 아름다움이 담긴 가구, 감상하고 감동받는 가구를 만드는 데 평생을 온전히 쏟았다.
 
생활도구가 아닌 작품의 가치를 지닌 가구를 지어온 박명배 보유자
 
우연으로 들어선 길
    충남 홍성에서 나고 자란 18세 소년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마땅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도 없이 청운의 꿈 하나로 시작한 서울 생활. 일도 직장도 여건에 맞춰 선택해야 했다. “이쪽 분야에 종사하는 인척 형이 권하기에 시작했죠. 해보니 적성에도 많고 할 만하더라고요. 그래서 하다 보니 일흔이 다 됐네요.” 시작은 전통공예가 아닌 현대공예였다. 그는 인척 형의 소개로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공예과 최회권 교수가 운영하는 공예미술연구소에 취직해 소목일을 시작했다. 그 공방은 서라벌예대 전공자들이 나와 최 교수의 작업을 돕기도 하고 자신의 작품 활동도 하는 곳이었고, 박명배 보유자는 공방의 막내로 견습생 생활을 했다. 아무렴 견습생 생활이 쉬울 리가 있었을까마는 배우는 재미에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다.
    현대공예에서 전통공예로 전환하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닌 불운한 계기 때문이었다. 1971년 최 교수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 수년간 공방에 있으면서 맺은 인연으로 허기행 선생에게 짜맞춤 기법을 배우게 되면서 전통가구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된 박명배 보유자. 그 후 13년 만인 1981년 자신의 공방을 차려 소목장으로서 본격적인작품 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스스로 개척한 길
    춥고 배고픈 세월을 지나 이제는 다 잘 풀릴 것만 같았다. “꼭 서울대 나와야 대학 나온 것이냐, 그건 아니잖아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밑에서 배워야만 정통 계보로 인정받는 풍토를 스스로 깨고 나가야 했어요.” 그는 역사성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고 그것은 계보가 아닌 작품을 통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左)50여 년 소목일을 해온 박명배 보유자의 다부진 손         右)삼층책장(가로 1275×세로 550×높이 1960, 느티나무 오동나무 거멍쇠)

     비록 무명인이지만 솜씨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는 각오와 노력으로 그는 결국 역사성을 인정받게 된다. “최순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찾아가 지도를 받았어요. 수많은 유물을 접하면서 우리 전통가구에 대한 지식을 쌓았죠.” 최순우 관장의 소개로 청와대 영부인실의 안방가구와 로마 교황청박물관 한국관 가구, 스웨덴과 오스트리아 한국문화원의 가구 등을 만들었다. 최순우 관장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스스로 길을 개척해나갔다. “동아공예대전, 전승공예대전 수상과 대한민국 명장,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를 목표로 삼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동아공예대전은 네 번째 도전에 대상을 받았고 전승공예대전은 9년 만에 대통령상을 받을 수 있었어요.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으로도 지정됐죠. 그런데 무형문화재라는 목표는 쉽게 이뤄지지 않더군요.” 좌절은 박명배 보유자를 단련시켰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만 몰두했다. 문갑 하나를 만들어도 박물관마다 수장고를 다 뒤져 자료를 조사하고 열람 신청을 해 실측하는 과정을 거쳤다. 심사 기준에 맞는 작품이 아니라 예술성 있는 작품을 목표로 작업을 이어갔다. “2010년, 61세에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됐습니다. 늦게 된 것이 저에게는 득이었어요. 그만큼 스스로를 더 단련시켰죠. 그러면서 욕심을 부리면 기교가 강해지고 기교가 강해지면 명품을 만들 수 없다는 걸깨달았어요. 집에 쌀이 있는지 떨어졌는지, 아이들이 학교를 잘 다니는지 잘 크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작업에만 매달렸죠.” 작품성 하나로 인정받은, 국가무형문화재 소목장 보유자라는 이름은 그에게 감사하고도 무겁다. 개인적인 창작 욕심도 내려놓고 전통을 재현하고 이어가는 소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 그만큼 전통가구의 가치가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01. 국가무형문화재 소목장 보유자라는 이름은 박명배 보유자에게 감사하고도 무겁다.
02. 나무는 수백 년을 거쳐 자라기 때문에 무늬(선)가 다양하다.  다양한 무늬 속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문양이 숨어 있다.
03. 손때 묻은 대패
 
짜맞춤 , 허술함이 아닌 견고함
    “우리나라의 목가구는 나무를 풍족하게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순한 구조로 발전해왔어요. 이런 단순함과 간결함은 세계적인 디자인 트렌드와도 일맥상통하죠. 조선시대의 전통공예는 현대의 시각으로 바라봐도 그 디자인이나 목재 이용방법, 즉 결구에 있어서 간결함의 미학이 뒤지지 않아요.” 짜맞춤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속에 숨겨 있다. 전통가구는 짜맞춤과 같이 매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과 나무를 적절히 잘 다루는 장인의 솜씨로 만들어졌기에 오랜 시간 견고하다. 못이나 접착제에 의존하지 않아도 더없이 튼튼하다. “못은 목재보다 훨씬 빨리 부식됩니다. 겉으로는 못을 박아야 튼튼해 보이지만 짜맞춤의 견고함에 비할 바가 못 되죠. 더불어 매우 독특한 짜임형식으로 나타나 결구 자체가 미적인 요소로 작용한답니다.”
     박명배 보유자는 이러한 전통가구의 가치를 지키는 동시에 제자들을 통해 새로운 길을 펼쳐나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가구 작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가 작가의 길을 가라. 제가 이수자들에게 하는 말이에요. 20~30년 배워야 비로소 장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긴 세월 노하우를 축적해 그 실력이 발휘됐을 때 그만큼 인정받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장인의 길도 좋지만 작가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기법을 전수해나가겠지만 현대적인 예술 가구를 만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요.” 보유자로 인정받기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이수자들이 전통의 토대 위에 더 넓게 보고 더 새롭게 창작의 나래를 펼쳐나가길 바라는 것이 그의 마음이다 .
박명배 보유자는 늘 부르짖는다. 사용만을 위한 가구는 대형 몰이나 홈쇼핑에서 사고 전통의 아름다움이 담긴 가구를 갖고자 한다면 우리를 찾으라고. 세월이 지날수록 값이 높아지는 작가의 그림처럼 예술로서 가치가 지속되고 더해지는 가구를 만드는 것. 작가이든 장인이든 그 근본은 달라도 추구하는 가치에 있어서는 같은 길일 것이다.
    “다음 전시회는 여백의 미를 주제로 준비하고 있어요.비울 때 채울 수 있고 비우는 것만큼 편안한 것이 없잖아요. 이렇게 제 작품도 만들고 제자들도 가르치면서 재미있게 살아요.” 현대인, 현대 삶과의 공존을 늘 고민하는 박명배 보유자. 그가 짓는 가구는 오늘날의 전통이자 이 시대의 예술이다.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온전히 이어 가면서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그는 즐거운 고민을 하며 그렇게 재미있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