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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속 경기전의 위엄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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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속 경기전의 위엄
'사적 제339호 전주 경기전'

    전주한옥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시간이 뒤섞이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걸어 다니면서 ‘셀카봉’을 들고 스마트폰으로 ‘셀피’를 찍고 있는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론 한복을 입고 전동 휠을 타고 다니는 재미난 광경도 볼 수 있다. 전통 찻집과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조선시대에 ‘잡인’들은 얼씬도 하지 못했던 길목에 버스킹을 하는 젊은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전주한옥마을. 이곳에선 전동성당의 로마네스크식 우아함과 조선의 자긍심을 한눈에 볼 수도 있다. 어딜가나 사진을 찍기 위한 인파로 북적이는 곳이지만 특히나 전동성당 건너편, 반짝이는 햇살 아래 울창한 대나무들 틈 속에 우뚝 솟은 전주 경기전은 그 자태가 너무도 위풍당당해 절로걸음을 멈추게 한다.
 
사적 제339호 전주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1410년 창건된 곳이다
 
조선의 자존심을 품은 전주
    전주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1410년 창건된 곳으로 사적 제3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 제317호인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을 비롯해 다양한 유적을 만나볼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또, 지난 2012년 개봉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주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광해군 8년, 『광해군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15일간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천만 관객을 가뿐히 넘기는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그해 대종상 영화제 15관왕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경기전의 아름다운 담벼락만 봐도 이병헌과 한효주의 애틋한 사랑과 감정의 풍파가 느껴질 정도다. 영화 속 이병헌의 슬픈 눈빛을 잊지 못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전주한옥마을 최고의 ‘힙 플레이스’를 꼼꼼히 살펴봤다.
    앞서 언급했듯, 경기전은 조선의 얼굴과도 같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그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담은 초상화가 왜 전주에 봉안되었을까? 전주는 본디 이왕조의 시조인 신라 사공 이한 공의 발상지로 불렸다. 그래서 자연스레 전주 이씨 후손들이 조상을 받드는 성역으로 삼아온 터전이 될 수 있었다. 태종은 1410년에 완산(전주), 계림(경주) 그리고 평양 3개소에 태조 강헌대왕의 영정을 봉안해 어용전(御容殿)이라 칭했다. 그 후 세종 24년(1442)에는 전주에 경기전(慶基殿), 경주에 집경전(集慶殿), 평양에 영숭전(永崇殿)이란 호칭을 붙였다. 조선의 강한 기상을 품고 있었던 탓일까. 전주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태인 유생 안의, 손홍록 등과 함께 빼내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實錄)과 함께 내장산에 숨겼다. 전쟁이 끝난 뒤에 다시 조정에 바쳐 경기전에 모셨다. 이후 광해 6년(1614)에 중건돼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01.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포스터     02. 사적 제339호 전주 경기전   03. 좌측에서 바라본 전주 경기전 본전   04.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얼굴을 보관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인지 경기전은 자주 풍파를 겪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 이와 관련된 재미난 일화가 있다. 관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전주성 안을 향해 대포를 쏘다 그만 경기전 건물의 처마가 부서지고 조경단이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한 것. 당시 전주를 점령하고 있던 농민군의 지도자 접주 전봉준(全琫準)은 관군을 지휘한 초토사 홍계훈에게 보내는 소지문(訴志文)에서 “전주감영에 대포를 쏜 것이 저희 죄라고는 하지마는 성주를 시켜 대포를 쏘아 경기전을 무너뜨린 것은 옳으며, 군대를 동원해서 문죄를 한다면서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은 옳습니까?”라고 비난을 했던 것이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 왕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모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단순히 왕의 용안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넘어 그의 혼백을 담는다는 엄청난 행위였을 거다. 조선 창립자의 혼백이 깃든 경기전은 그래서 더 특별한 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경기전 입구에 들어서면 하마비(下馬碑)를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말에서 내리는 곳’을 의미한다. 경기전이 중건되던 광해 6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철종 7년(1856년)에 중각(重刻)됐다. 비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물론 지금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라 버스킹을 비롯한 거리 공연을 하는 젊은이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말이다. 경기전 하마비는 여느 하마비와는 달리 판석 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사자(혹은 해태)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다.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뿐 아니라 경기전을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경기전을 얼마만큼 중하게 여겼는지, 그 위상을 느낄 수 있다. 하마비를 지나 경기전에 들어서면 조선시대의 조경을 짐작할 수 있는 멋진 대나무 숲과 산책길이 보인다. 쏟아지는 햇살 틈으로 울창하게 뻗은 대나무,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올렸을 조선시대 양식의 건축물이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그중 신도(神道)라는 푯말이 흥미로운데, 이는 이성계의 혼백이 다니는 길을 의미한다. 그의 초상화를 모신 정전(正殿)이 경기전의 핵심 공간임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푯말도 아니다. 정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가 걸려있지만 보호 차원에서 가품을 걸어뒀다고. 온화한 듯 진품은 경기전 안 어진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동문 쪽에는 조선의 8대왕 예종의 태실, 즉 탯줄이 묻혀있는 태항아리와 비석이 눈에 띈다. 재위 15개월 만에, 스무 살에 죽은 왕의 혼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대개는 산봉우리 근처에 자리하나 예종의 태실은 1928년 일제에 빼앗겨 파괴됐다. 1970년 폐허가 된 예종의 태실과 비를 경기전 안으로 옮겨 복원하고 전북 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했다고. 대체 왜 태실을 가져가 파괴하는지 모르겠지만, 조선의 혼이 살아있는 경기전에서 예종의 혼도 안식을 찾길 바랄 뿐이다.
 
01. 전주 경기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가 모셔져있다.    02. 전주 경기전에서 촬영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주요 장면
03.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얼굴을 보관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인지 자주 풍파를 겪었던 전주 경기전
04.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관군이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전주성안을 향해 대포를 쏘다 경기전 건물의
       처마가 부서지고 조경단이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서문으로 가보면 가까이 전동성당이 보인다. 동서양 건축양식이 만나는 지점이 재미있다. 담벼락을 보니 왕이 된 하선(이병헌)이 중전(한효주)의 손을 잡고 도망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워낙 낭만적인 디자인이라, 두 사람의 사랑이 싹틀 수밖에 없겠다 싶다. 잘 정돈된 산책길을 따라 걷다 동문과 서문을 돌아 나오면 다시 처음에 들어온 그 입구다. 이성계 초상화 원본과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보관되어 있다는 어진 박물관 표지판을 지나치기 힘들 거다. ‘왕의 초상화 전문 박물관’이라는 친절한 설명처럼 조선시대 태조,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을 모신 곳이다. 경주, 평양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임진왜란 때 소실돼 전주 경기전에 있는 것이 유일하다고. 역대 조선을 지킨 왕들의 용안을 보고 있노라면 전주 경기전이 왜 조선을 품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