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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징이자 평화의 시작

2019-05-31

문화 문화놀이터


DMZ가 숨겨둔 보물
분단의 상징이자 평화의 시작
'대성동 자유의 마을'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은 공기나 물이 오염돼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리 선조들이 오순도순 모여 살며 농사를 짓고 삶을 이어오던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군사 분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 각각 2km씩 군사 완충지대인 비무장지대(DMZ)가 생기면서 그곳에서는 5,000년 동안 이어져왔던 우리 민족의 삶도, 우리의 문화도 모두 땅속에 묻혀버렸다. 
 
긴장 속에 평화가 느껴지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에서 서남쪽 바로 옆에는 남측 비무장지대(DMZ) 내의 유일하게 민간인이 살고 있는 대성동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에 있는 대성동 마을은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기정동 마을과 비무장지대에 조성된 선전마을이다. 이 남북한의 두 마을은 분단의 상징이자 평화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다.
 
01.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02.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 가면 남북대치 상황의 최전방 마을임을 실감할 수 있다.
03. 대성동 자유의 마을 어린이들명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안에 남북이 각각 1곳씩 민간 거주 마을을 두기로 합의하면서 그해 8월 3일 북한 '기정동 평화의 마을'과 함께 탄생했다. 군사정전위원회는 대성동 마을을 '자유의 마을'이라 불렀다.
남북의 두 선전마을의 거리는 1km 남짓밖에 되지않지만 지난 66년 동안 코앞에서 뼈아픈 분단의 역사를 지켜봐왔다. 필자는 ‘서부DMZ 반세기만에 베일을 벗다’라는 DMZ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대성동 자유의 마을’을 여러번 방문해 취재한 적이 있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아이러니하게도 ‘긴장 속에 평화’를 느끼게 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북한 기정동 마을과는 오갈 수 없다는 분단의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나라 어느 시골마을과 같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마을 회관을 비롯한 곳곳에는 군인들이 철통같은 경계작전을 삼엄하게 편다.
고향이 이곳인 사람만이 살아왔고 외지인의 입주가 허용되지 않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옆집의 숟가락 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족같이 지내고 있다. 자유의 마을은 2018년 기준, 49세대 193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성동 마을의 이름은 처음에'토성(土城)'이었으나 '태성(台城)'이라고 불리다가 유엔군이 ‘대성’으로 발음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군사분계선 가장 가까이 팔각정이 있는 자리에 언제 축조됐는지는 확실치 않은 옛 토성이 있어 ‘태성’이라고 불렀다. 

 
01.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행정구역상 경기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로, DMZ 내에 위치한 특수한 마을이다.
02. 대성동 자유의 마을 민가의 우체통     03. DMZ 내 유일하게 민간인이 살고 있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민가
 
24시간 통제속의 생활… 국방의무·세금은 면제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특이하게 대한민국 법률에 따라 규제를 받지만 유엔사령부의 통제 아래 있다. 주민들의 출입까지 통제되는 곳이다. 외부인은 마을 주민의 초대로 사전에 신청한 사람만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그것도 정해진 시간만 출입할 수 있다.
    출입할 때는 공동경비구역(JSA) 민정중대의 경호를 받아야 한다. 마을 주민들도 마을을 나갈 때는 사전에 군부대에 통보해야 하며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는 통행이 금지된다. 저녁 7시에는 민정중대가 가구별 인원점검을 한다. 마을의 위치적 특성상 민정중대가 24시간 상주하고 있어 치안 유지는 확실하다.
UN군의 통제가 있어 여러 가지 생활에 불편함이 따르지만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 혜택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과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는다. 병역 면제 악용을 막기 위해 외지에서 시집온 며느리는 주민이 될 수 있지만, 딸은 외부 남자와 결혼하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
    또한 거주권 심사가 까다롭다. 8개월 이상 계속 살지않으면 주민 자격이 상실된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타지로 나가는 경우는 제외된다.
주민들은 땅과 건물에 대해 개인 소유권은 없고 경작권만 인정돼 쌀, 콩, 고추 등을 주로 재배해 소득을 얻고 있다. 특히 세금을 내지 않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계속되면서 농가 소득은 해마다 상승해 주민들 대부분이 부농의 꿈을 키워왔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남북의 국기게양대
    이곳에 있는 남북의 국기게양대는 지난 분단 세월 동안 갈등과 반목, 경쟁의 역사를 느끼게 한다.
남쪽의 태극기 게양대는 대성동 공회당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으나, 198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더 높게 설치했다고 한다. 게양대 높이는 100m에 가까운 99.80m이고, 이 게양대에 거는 태극기의 크기도 가로 12m, 세로 19m의 초대형이다. 1979년부터 1983년 사이에 이루어진 대성동 제2차 종합개발 공사 시 세워졌던 국기게양대는 당초 85m로 설계되었으나 국기봉이 짧고 국기게양과 내릴 때 태극기가 손상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1981년 12월부터 1982년 1월에 걸쳐 보수공사를 실시해 국기봉의 높이를 15m 더 높여 보강해 현재의 높이인 99.80m로 만들었다.
    북한에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높게 설치한 것이다. 이에 맞서 군사분계선 너머 북한 기정동 인공기 게양대도 원래 80m 높이였지만 남한을 의식한 듯 165m 높이로 다시 만들어 세웠다. 국기게양대 높이에서도 선전마을에서는 남북의 자존심 대결을 넘어 총성 없는 전쟁이 진행된 것이다.
우리의 태극기와 북한의 인공기가 두 마을 중심에서 서로 마주 보며 한민족이면서도 갈라져 살아온 분단 민족임을 상징하고 있다.

 
01. 대성동공동미곡창고              02. 대성동 자유의 마을의 유일한 교육시설인 대성동초등학교
03. 1979년부터 1983년 사이에 이루어진 대성동 제2차 종합개발 공사시 세워졌던 국기게양대        04. 농사를 짓는 마을 주민들
 
통일이 된다면 남북한 두 마을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해야
    전쟁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54년 현재의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전선은 교착상태를 보였다.
대성동과 기정동 마을은 정전회담이 열리던 판문점 근처라 교전에서 제외돼 일반인들의 거주가 가능했다. 2년 넘게 지속되었던 정전회담 덕분에 당시 전쟁 대치선에서 유일한 비전투 지역이라는 혜택을 받은 것이다. 정전협정 시 비무장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마을에 민간인이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한의 기정동 마을(평화의 마을)이 그러하듯 남한의 대성동 마을(자유의 마을)도 북한을 향해 남한의 우월함을 선전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 새로운 선전마을 조성계획을 추진했다.
    남북한 정부는 각종 혜택과 꾸준한 지원과 관심으로 현재의 두 선전 마을을 유지해오면서 남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해왔다.
지난 분단 세월 동안 남북한 대치 현장에서 온몸을 던진 두 선전마을. 통일이 된다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켜 이념대립과 갈등, 전쟁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전 세계인에게 알려주는 살아있는 교육과 산 역사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