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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자연이 서로 기다리고 만나 만들어진 명승

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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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자연이 서로 기다리고 만나 만들어진 명승
'도봉산'

    우리나라 사람들의 등산애호는 예부터 남달랐다. 경치 좋은 명산을 찾아다니며 남긴 기행문, 시문과 바위각자, 회화를 비롯해 요즘 등산용품만을 고집하던 중소기업들이 크게 성공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무엇보다 이런 경향은 도처에 우뚝 솟은 산들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향유하던 명승지였던 것에 기인한다. 이번에는 그간 숨겨져 있던 조선의 명승, 도봉산길에 올라본다. 안대회 교수는 조선 후기 남승도를 보면 포천의 금수정, 금강산과 함께 도봉이 조선 최고의 명승 중 하나였다고 했다. 성해응의 『동국산수기』에도 도봉산이 언급된 것을 보면 당시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지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도봉산을 ‘명승’ 이게한 도봉서원
    하늘이 명승지지(名勝之地)를 마련한 것은 그 사람들에게 사치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거기에 가지 않으면 명승이 또한 스스로 나타나지는 못한다. 이것은 서로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이치이다(부용재기).
    번암 체제공의 명승에 관한 글을 좇다 보면 도봉산의 무엇이 조선의 명승지로 대박 나게 한 것일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우리나라 명승을 부흥시킨 유홍준 교수는 TV 프로그램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답사지로 선암사를 꼽았다. 다음 날, 사찰 일주문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여러 문헌을 찾다 보면 도봉산이 명승으로 각광받게 된 요인은 도봉서원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도봉산을 주제로 한 유산기들도 거의 도봉서원 건립 이후의 글들이다. 또 성해응의 『동국산수기』는 도봉산을 소개하면서 도봉서원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도봉서원은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된 영국사 터에 1573년 조선의 사림정치를 선도한 정암 조광조를 추존하고 1696년 우암 송시열을 추가로 봉안했던 사액서원이다. 사림파들이 득세하자 유림 내 당파를 막론하고 이 도봉서원을 드나들며 추모하고 많은 시와 글을 남기면서 비로소 명승으로 회자되었을 것이다. 도봉(道峯)이 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사찰이 처음 창건될 때부터 붙여졌다고 한다. 최근 발굴 결과에 의하면 도봉산(道峯山) 도봉계곡에서는 율곡 이이가 쓴 <도봉서원기> 에서처럼 고려시대~조선시대 도봉산 영국사와 조선시대 도봉서원이 한자리에서 확인되었다(박찬문, 2018). 이 내용은 최립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발굴 조사 결과, 도봉서원은 여러 차례 중건되었고 훼철된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영국사 시절의 유물들이 대거 발견되었다고 한다.

최립(崔?) 간이집(簡易集) 제6권 「초미록(焦尾錄) 차운하여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제하다」
옛 절터에 새 서원 영욕이 서로 점철된 듯 / 榮辱新規與舊基
도봉이란 그 이름 기이한 인연을 깨닫겠네 / 道峯終覺設名奇
봉우리마다 수려한 빛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 巖巖秀色當空聳
콸콸 흐르는 찬 시냇물 잠시도 쉬질 않는구나 / 活活寒流不?衰
선현을 모신 이곳 혼령이 오르내리나니 / 揭妥前賢森陟降
학문 닦는 후학이여 미위를 삼가 살필지라 / 藏脩後學謹微危
만정의 이적보단 정사가 더 낫고말고 / ?亭異迹輸精舍
오늘날 우리 동방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보겠도다 / 今見吾東一武夷

 
01. 광륜사는 신라시대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02. 도봉계곡의 청아한 풍경에 초여름더위가 사라진다.     03. 산중턱에서 올려다본 도봉산 정상인 만장봉
 
도봉서원 곁의 계곡과 각석군
    성해응이 경기도의 산수를 기록한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도봉산은 한양의 동쪽 길에 우뚝 서 있다. 만장봉은 더욱 높이 솟아 있으며 망월암은 그 옆 산기슭에 있다. 도봉서원이 그 서쪽 골짜기에 있는데 감상할 만한 샘물과 돌이 있으니 고인이 된 유희경의 소유물이었다. 서원에는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양하고 있고 침유당은 서원의 동쪽에 있다. 샘물 소리가 더욱 맑고 빠르나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소광정이 있고 봉우리 동쪽에는 조계폭포가 있다.
    성해응이 『동국산수기』에 꼽은 도봉산의 명승자원은 만장봉, 망월암, 도봉서원, 계곡, 침유당, 소광정, 조계폭포다. 이 중 도봉서원과 침류당은 유희경과 관련된다. 유희경(1545~1636)은 여항문인으로 양주목사 남언경을 도와 도봉서원을 건립한 인물로 도성 안에 침류대를 경영하면서 이곳 도봉산에 살았다(이종묵, 2006). 유희경의 호는 시은(市隱)으로 저자거리에 은둔한다는 뜻이며, 세상 가까이에 살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침류당은 1615년 도봉서원 옆에 그가 세운 것이다. 계곡에 ‘도봉동문’ ‘복호동천’ 등 바위글씨가 남아 있어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8호로도 지정된 바 있다. 심조의 『도봉행일기』에는 도봉서원 일원 계류에 바위각자를 언급하고 있어 당시 주변 경관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물주가 만든 기묘한 솜씨’, 만장봉
    만장봉에 관한 묘사는 박세당의 시에도 나타난다. 그는 수락산에 들어와 살면서 늘 도봉산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시에는 조물주가 만든 기묘한 솜씨라 하여 도봉산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가운데 밝은 달과 어우러진 모습과 꽃이 만발한 자연의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박세당(朴世堂), 『서계집(西溪集)』 권4, 「도봉산(道峯山)을 바라보며 짓다」
조화옹의 기교에 마음 몹시 놀라니 / 奇巧心偏怪化翁
수많은 손놀림이 신묘 막측하구나 / 幾般?弄妙難窮
온갖 형상이 땅 아래에 조밀한데 / 萬形掩?黃塵下
한 바위 봉우리가 창공을 찌르네 / 一骨嵯峨碧落中
달을 보매 세상의 어둠 아랑곳없고 / 看月不妨人界黑
꽃을 흩날리매 내내 하늘이 붉어라 / 散花長得佛天紅
벼랑 중턱 노송에 걸린 높다란 둥지 / 半崖松老危巢倒
몇 조각 구름이 학의 뒤를 따르네 /數 片雲隨鶴背風

    다른 본에는 제2연이 ‘온갖 형상이 웅장한 대지에 낮게 깔려 있는데 하나의 봉우리가 광활한 우주에 우뚝 솟았네.[萬形低壓?埃壯 一掌高開宇宙空]’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이 부분이 다른 구절로도 전한다 해도 어찌 되었든 만장봉을 가리킨 것만은 분명하다. 이중환의 『택리지』‘팔도론’에도 도봉산의 만장봉 바위봉우리가 언급된다. 이정귀는 백사 이항복과 함께 도봉산을 유람한 기록도 남겼다.

 
01. 도봉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산행을 시작하고 있다.    02. 도봉산은 산새들에게 풍요로운 보금자리이다.
 03. 자운봉, 마당바위 등으로 이어진 갈림길                  04. 해발 718m의 만장봉으로 가는 험준한 비탈길

    이정귀(李廷龜), 『월사집』 권38, 「유도봉서원기(遊道峯書院記)」
을묘년(1615, 광해군7) 가을, 내가 백사에게 이르기를, “수락산의 가을 폭포가 한창 장관이고 도봉산에는 새로 계당(溪堂)을 지었다 하니, 오늘 함께 구경하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하니, 백사가 흔쾌히 승락하면서 “수락산은 내가 날마다 가는 곳이니, 나는 도봉산에 가 보고 싶구려. 그대와 함께 가니, 매우 즐거운 일이오.” 하고는, 즉시 아이를 불러 지팡이와 신발, 복건(幅巾)과 베옷을 준비하게 하여 여장을 갖추어 노새를 타고 나섰다. 시내를 따라 갈대숲 속으로 난 길을 수십 리 가서 누원(樓院)의 대로를 지나 동구로 들어서니, 이미 별세계(別世界)였다. 시냇물 소리와 산색(山色)이 너무도 좋아 일일이 감상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으니, 참으로 산음(山陰) 길을 가는 것과 같았다. 그 긴 폭포, 깎아지른 골짜기, 얕은 시냇물, 겹겹의 모래톱, 맑은 못, 우뚝 솟은 벼랑에 물가며, 언덕이며, 섬이며, 바위들이 다투어 기이한 형상을 바치니, 마치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등산 코스로 더 잘 알려진 도봉산은 조광조, 송시열의 영향으로 도봉서원이 명승으로 가치를 얻게 되면서 그 일대가 명승유연의 대상으로 확장된 것이다. 지금은 그 안에 많은 유적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소실되고 변화되었지만 우뚝 솟은 도봉산의 산세는 옛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긴다. 도봉산을 통해 진정 명승은 사람과 자연이 서로 기다리고 만나야만 만들어진다는 이치를 보게 된다. 아름다운 우리 국토의 명승들은 우리가 부지런히 다녀서 그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되는 것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