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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필선으로 마음에 합한 그림을 그리다

201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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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함 속의 심오함
최소한의 필선으로 마음에 합한 그림을 그리다
'연담 김명국의 <달마도>'

    ‘예술가’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이렇다. 현실보다 꿈을 좇는 사람, 그래서 생활력이 없고 상식이나 일반 규범을 과감하게 뛰어넘어도 용납되는 사람, 술을 엄청나게 잘 먹어야 되고 지저분한 외모를 지녀야 하며 자다가도 벌떡일어나 창작에 몰두해야 하는 사람, 성격이 거칠거나 괴팍해야 하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상한 행위나 버릇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 평생 가난하고 외로우며 불행하게 살다가 일찍 죽거나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 이런 모습은 유독 화가에게 많이 적용된다. 이렇듯 왜곡된 예술가상을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데에는 매스컴의 역할이 지대하다. 이런 이미지는 천재 예술가인 경우 대부분 용서가 되며, 때론 신화로 승화되기까지 한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창작해 인류에게 보답 했기 때문이리라. 
조선 회화사를 수놓은 화가들의 미스터리
    조선 회화사를 수놓은 화가 중 ‘신필’로 불리는 세 명의 천재가 있다. 연담 김명국, 호생관 최북, 오원 장승업. 이들은 모두 술과 친했으며, 창작의 배경에 괴팍한 버릇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죽음에 미스터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연도가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의 화가 천시 풍조가 이들의 생애를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탓도 있다.
이런 모습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준 이는 최북(1712~1786?)이다. 중인 출신으로 조선시대 엄격한 신분 사회를 헤집어온 그의 일생은 가난했고 외로웠으며 처절하게 살다가 눈보라치는 밤길을 만취 상태로 걸어오다 그야말로 비참하게 객사했다.
 
(左)김명국의 <달마도>는 원래 일본에 있던 것을 국내에 들여온 것으로, 통신사행 중에 그린 작품으로 알려 져 있다.
순식간에 그려진 거침없고 호쾌한 필치는 그의 대담하고 호방한 선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右)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필치가 돋보이는 <녹수선경도>

    천재의 기운이 듬뿍 묻어나는 최북의 회화는 인문적 향기를 격정적 낭만성으로 풀어내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사실 그는 자기 눈을 찌른 미치광이 화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이유가 무리한 그림을 요구하던 고관대작에게 대적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성정 탓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최북은 자조적 흔적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호는 ‘호생관’이다. 풀이하면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름의 북(北)자를 둘로 쪼개 ‘칠칠(七七)’이라는 자를 썼다. 스스로 ‘그림이나 그려 먹고 사는 칠칠이’라는 자기 비하를 통해 세상에 대한 울분을 삼켰던 것이다.
    조선 말기 화가 장승업(1843~1897?)도 이에 못지않다. ‘업을 잇는다’는 뜻의 이름을 쓴 것으로 볼 때 중인 출신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무슨 종류의 직업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림으로 조선 말기를 휘어잡았다. 왕의 총애까지 받았지만 그의 자유정신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술과 여자, 방랑으로 생애를 수놓으며 탁월한 재능을 떨치다 소리 없이 사라져 신비감을 더한다. 평소 술에 취하면 신선이 되겠다던 생각을 실천한 것은 아닐까.
취옹( 醉翁)
    안견 이후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연담 김명국(1600~?)은 최북이나 장승업에 비하면 존재가 그나마 역사에 흐릿한 윤곽을 새기고 있다. 도화서 화원으로 벼슬을 했고, 임진왜란 후 일본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두 차례(1636년, 1643년)나 일본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그림 재능을 인정받았고, 그의 신필을 알아본 일본 관리들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선종화를 선호했던 일본의 취향이 선화에 능했던 김명국과 꼭 맞았던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김명국 하면 일반인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 나왔던 <달마도> 가 그의 작품이라면 ‘아, 그 그림’ 하고 기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필력으로만 본다면 조선 회화사를 통틀어 그를 능가할 화가가 없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할 정도로 천재성이 보인다. 그만큼 기행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많다.
특히 술은 그에게 창작의 촉매제였다. 스스로 ‘취옹(醉翁)’ 즉 ‘술 취한 늙은이’라는 아호를 지어 쓸 정도였으니까. 기록에 의하면 “사람 됨됨이가 거친 듯 호방하고,농담을 잘했으며, 술을 즐겨 한 번에 몇 말씩 마셨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면 실컷 취하고 나서 붓을 휘둘러야 더욱 분방하고 뜻이 무르익었으며, 필세는 기운차고 농후하여 신운이 감도는 것을 얻게 된다. 그의 걸작 중에는 미친 듯 취한 후에 나온 것이 많다고 한다. 때문에 좋은 작품을 얻으려면 반드시 술독을 지고 가야했다”고 전한다.
    그런 흔적이 잘 보이는 작품으로는 <달마도>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눈 속에 나귀 타고 돌아오는 사람>가 있다. 이 그림은 취중에 완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인물부터 그린 것으로 보인다. 나귀 탄 선비와 시종은 취기가 시작될 무렵 그린 탓에 섬세하고 정확한 사실 묘사가 돋보인다. 앞쪽 다리와 바위, 나무 그리고 중간 참의 길과 집은 서서히 취흥이 오를 무렵 그린 듯 필세가 힘차다. 설경의 백미인 눈 덮인 산과 하늘에 이르면 취흥의 절정에서 나온 신필의 경지가 묻어나고 있다.
김명국 하면 역시 <달마도>다. 중국 선종을 창시했다고 알려진 달마 스님의 초상이다. 선종은 6세기경 중국으로 들어온 인도의 달마 스님이 9년간 면벽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서 알려졌다. 참선 수행하는 달마의 모습이나 얼굴만을 부각시켜 그린 것을 <달마도>라고 한다. <달마도>는 부릅뜬 눈을 강조한다. 눈에 힘이 없으면 달마도로서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여겨진다. 달마 스님이 면벽 수도 중 졸음을 이기려고 눈꺼풀을 잘라버렸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형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참선의 경지에서 깨달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리라.
불교의 한 종파로 1,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선종의 대표적 이미지인 <달마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권 여러 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제작돼왔다. 그중 가장 출중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 김명국의 작품이다.
 
(左)<달마도>와 함께 김명국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설중귀려도>
(中)김명국의 활달하고 호방한 필묵법을 출실하게 보여주는 <달마절로도강도>
(右)비밀스런 처방이 적힌 족자를 가운데 두고 얘기가 한창인 두 신선을 그린 <비급전관>. 두건에서부터 도포자락에 이르기까지 굵기에 변화를 둔 빠른
필치의 감필법을 구사하였다.
 
천재의 필력이 담긴 명작
    이 작품은 강한 먹과 옅은 먹으로 농담을 조절해 강렬한 대비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얼굴은 옅은 먹으로 옷은 짙은 먹으로 그렸는데, 모두 한 호흡으로 그렸다. 옅은 먹선은 인간적 면모의 달마를, 짙은 먹선의 강렬한 표현의 옷은 정신적 의지를 보여준다. 붓의 속도에서 주저함이 전혀 보이지 않고 순식간에 그려야 나타날 수 있는 분위기가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천재의 필력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서만 나오는 표현력이다. 붓글씨로 단련된 그의 필선은 대상 핵심만 간추려 표현하는 감필법에 능했는데, 인물화에서 많이 쓰인 전통회화 묘사법이다. 감필법을 유창하게 구사하려면 필력 외에도 사물의 특징을 한눈에 걸러낼 수 있는 직관력이 필수다. 김명국의 감필법은 <달마도>에서 절정을 보인다.
    표정의 성격에서도 김명국의 화재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오랜 수도로 지친 표정을 만들기 위해 옅은 먹으로 얼굴을 그렸다. 눈은 활짝 뜨고 있지만 피곤함이 흠뻑 묻어 있다. 정신력으로 버텨내는 수행의 고통은 미간의 강한 먹선(얼굴에서 유일하게 쓴 짙은 선이다)으로 표현하고 있다. 면벽 수도의 오랜 시간의 흔적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나타냈다. 매부리코와 커다란 눈으로 인도인의 특징을 부각해 스님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달마의 모습도 함께 새겨놓았다.
    김명국의 신필을 보여주는 것은 강한 먹으로 거침없이 그려낸 옷이다. 먹선의 힘은 머리에 쓴 두건에서 얼굴을 타고 내려오는 오른쪽 선에서 절정을 보인다. 리드미컬하게 흐름을 보이는 선인데, 한 번의 붓질로 힘을 교묘하게 조절해 턱수염 부분에서 갈필 효과까지 보여준다. 이 때문에 선에서 힘이 더욱 강조되어 보인다. 합장한 손은 소매 속에 감추었지만 수행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소매의 선을 가장 강하게 그렸다. 강철의 힘이 느껴지는 긴장된 직선으로 처리해 달마선사의 수행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얼굴 표정은 취기가 오르기 전에 섬세하게 그린 것으로 보이며, 그의 필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옷 부분은 취흥의 절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의 초상은 종교적 아이콘처럼 알려져 현재까지도 여러 스님들에 의해 제작되기도 한다. 특히 선불교가 번성한 일본에서 <달마도>는 인기가 많았고, 스님뿐만 아니라 많은 화가들에게 의해 제작된 그림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