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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한 그릇에 담긴 우아함,옹기와 함께한 일평생

2019-07-15

문화 문화놀이터


투박함 속의 세련됨
수수한 그릇에 담긴 우아함,옹기와 함께한 일평생
'국가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 정윤석'

    턱턱턱턱…. 둔탁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크고 작은 옹기들이 가득한 마당을 지나 들어선 작업장. 그곳에서 50여 년 옹기장의 길을 걸어온 정윤석 보유자가 여념없이 소래질을 하고 있었다. 진흙을 빚어 형태를 만들고 가마에서 구워 완성되는 옹기는 세계에서 한민족만이 만들고 사용해온 독특한 음식 저장 용기이다. 정윤석 보유자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옹기의 전통을 이어가며 평생을 보냈다. 진흙 덩이가 하나의 옹기가 되기까지, 그 길고 지난한 과정은 옹기장으로 살아온 정윤석 보유자의 인생과 닮아 있다.
 
옹기와 일평생을 함께한 정윤석 보유자
 
옹기장이 되기 위해 버텨낸 치열한 과정
    “강진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겨우 마쳤지요. 그래서 혼자 힘으로 공부해보겠다고 상경을 한 겁니다.” 흙냄새 가득한 작업장 한쪽 테이블에 마주 앉은정윤석 보유자는 오래 묵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윤석 보유자의 부친은 옹기를 파는 상인이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그는 스스로 공부를 해보겠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직접 학비를 벌어 학교에 다니려는 계획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서울이라고 해서 내려보니 영등포더군요. 역전에서 주저주저하고 있으니까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시더니 자기 집에 같이 가자는 거예요. 배가 고파 따라가보니 여인숙이더라고요. 그 뒤로 역전에서 손님 호객을 하면서 지냈는데, 이건 아니다 싶더군요. 가족도 친구도 보고 싶었고요. 결국 얼마 못 가 고향에 다시 내려갔답니다.”
    그의 고향인 강진군 칠량면 봉황마을은 옹기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후 다른 일에 비해 벌이가 좋은 옹기장을 보고 옹기 제작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러곤 옹기점에서 일하던 외숙부를 찾아가 옹기 제작의 기초부터 익히기 시작했다. “직접 해봐야지 듣기만 해서는 늘지가 않아요. 수도 없이 반복하다 보면 손에 감이 오죠. 그땐 물레를 혼자 쓰는 게 아니니까 낮에는 일하고 밤에 남아서 연습하고 그랬어요.” 물론 쉽지 않았다. 흙이 손에 익을 때까지 수 없이 반복하는 방법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경쟁에서도 버텨내야 했다. “봉황마을에 있는 옹기점에 취직을 했는데, 저 말고도 작업장에 두세 명의 직원이 더있었어요.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이 만들어야 하니까 서로 경쟁이 치열했죠. 화장실도 얼른 뛰어갔다 와야 할정도였으니까요. 특히 김장철을 앞둔 가을에는 수요가 많아서 밤잠도 못 자고 일을 했답니다.” 봉황마을의 옹기장은 자신이 만든 옹기의 수에 따라 품삯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노농시간과 노동량은 늘어만 갔다.
    고된 하루하루 속에 잠시 다른 직업에 눈을 돌린 적도있다. 장사도 해보고 둑을 건설하는 현장에서 흙을 퍼나르는 일도 해봤다. 이 일 저 일 전전하다 결국 돌아간 곳은 늘 옹기였다.
   
전라도는 흙을 넓고 네모지게 펴서 만든 타래미를 발물레를 이용해 쌓아올리는 방법으로 옹기를 성형한다.
 
옹기의 사양길에도 지켜낸 전통
    그래도 그때는 옹기를 찾는 사람이 많아 힘들어도 보람이 컸다. 고되긴 하지만 돈벌이도 괜찮았다. 그런데 환경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옹기의 가격은 그대로다 보니 옹기장의 수입은 계속 낮아졌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옹기를 팔아보기로 했죠.” 30대 중반에는 독립을 해 봉황마을에 옹기점을 열었다. 1970년대 들어 플라스틱 그릇이 대중화되면서 옹기 수요는 점점 줄어들었다. 봉황마을의 옹기점도 하나둘씩 폐업을 했고, 옹기를 실어 나르던 운반선도 드라마 촬영용으로 팔려 불태워졌다. 하지만 정윤석 보유자는 그만둘 수가 없었다. 마을에 20곳이 넘었던 옹기점이 다 문을 닫고 정윤석 보유자만이 유일하게 옹기점을 운영했다. “가마에서 5, 6일씩 불을 때는데, 여러 집이 할 땐 품앗이로 마을 사람들끼리 도와서 했죠. 그런데 혼자 하려니 정말 힘들었어요. 그 시기에 가스나 석유로 때는 가마가 나왔고 그걸 도입해서 전통 가마와 병행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변하고 기술도 변해갔다. 지금 돌아보면 과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간 것 같다.
    옹기장이라는 업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그 길을 자신의 대에서 끝내려고 했지만 군대에서 제대한 막내아들(정영균 전수자)이 자신도 배워보겠노라고 나섰다. 처음에는 절대 하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제주를 빼고는 여기가 남쪽 땅 끝이잖아요. 매일 옹기만 만들었지 무형문화재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논에 나갔다가 들어와보니 ‘이 번호로 연락 달라’는 메모가 있더군요. 저녁이나 먹고 전화해보려고 했는데 먼저 전화가 왔어요. 산업인력공단 순천지소라면서 선생님 같은 분이 왜 기능전수자 신청을 안 하셨냐는 거예요.” 1996년 기능전수자(노동부 지정)에 이어 2004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2010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됐다. 그로 인한 지원은 정윤석 보유자에게 큰 힘이 됐다.
 
(左)옹기는 화장하지 않은 수수한 얼굴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右)진흙으로 옹기의 모양을 빚고 있는 정윤석 보유자의 손
 
누군가는 지켜가야 할 용기의 아름다움, 그 수수한 우아함
    “밖에 있는 항아리들을 보면 전부 배가 불러 있을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간장이나 된장을 담아놓으면 발효가 더 잘된답니다. 그게 전라도 옹기의 특징이에요. 옹기는 만드는 지역,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다 달라요. 쳇바퀴 타래미 기법도 우리 지역에만 있는 기법이지요.” 전라도는 쳇바퀴 타래미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옹기를 만든다. 다른 지역은 옹기를 성형할 때 진흙을 가래떡 처럼 만들어서 돌려 쌓아 만드는데, 전라도는 흙을 넓고 네모지게 펴서 만든 타래미를 발물레를 이용해 쌓아올리는 방법으로 옹기를 성형한다. 이 기법을 이용하면 옹기를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손으로 빚고 유약을 발라 1250℃에 이르는 고온의 가마에 구워 단단한 옹기로 완성한다.
    옹기를 만드는 과정이 그렇듯 옹기장의 업을 이어가는 길도 인내가 따른다. 그러나 그 시간을 견뎌내는 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누군가는 지켜내야 할 전통, 정윤석 보유자가 걸어온 길이 헛되지 않은 이유이다. “옹기 만들어놓은 걸 보면 화장하지 않은 수수한 얼굴 같은 아름다움을 느끼곤 해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지요.” 옹기를 만져보면 흙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진다. 매끄럽고 윤이 나는 그릇과는 또 다른 우아함이 묻어난다.
    “내가 죽은 뒤에 아들이 계속 할는지 안 할는지 모르지만, 옹기마을의 명맥이 안 끊기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정윤석 보유자는 주름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6월의 태양 아래 빛나는 옹기처럼 환하고 따스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