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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2019-08-05

문화 문화놀이터


자유와 자립의 염원으로 여백을 채운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태극기에 담긴 자유열망과 독립의지'

    근대 이후 태극기는 대표적인 국가 상징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렀다. 1882년 제작된 태극기는 이듬해 ‘국기(國旗)’로 제정되었고, 1897년 독립문에 새겨지면서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후 태극기는 국권은 물론, 자유와 평등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내걸어졌다. 그리고 2008년 ‘데니(O.N.Denny)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2호)를 비롯하여 총 20종의 태극기가 등록문화재가 되면서 대한민국 문화재가 되었다. [제381호~제394호; 제395-1호; 제395-2호; 제458호; 제468호; 제483호; 제648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극기
    왕권시대 태극기는 국가의 존엄을 상징하는 “소중하고 공경한 물건”(『독립신문』, 1896.9.22.)이었다. 그러나 국권이 흔들리던 대한제국기 자신들의 뜻을 태극기에 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청홍의 태극문양과 4괘로 구성된 태극기의 흰 여백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내는 또 다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의병장 고광순은 “머지않아 되찾는다(不遠復)”는 의지를 붉게적었고, 안중근은 피로써 “대한독립 만세”를 태극기에 물들였다.
등록문화재 제389호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의 여백에는 문수열과 70여 명 동지들의 서명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국가’의 상징으로 인식된 태극기는 3·1운동뿐만 아니라 수없는 독립운동 현장에서 휘날렸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태극기는 국가 상징물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아침 9시 집무가 시작되기 전 태극기 앞에서 집회식을 갖는 것을 의무로 했으며,(『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2호,1919.9) 1942년 6월에는 국기인 태극기의 양식을 표준화했다.(『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75호, 1942.6) 분명 수많은 태극기가 건물 안팎과 사람들의 손에 쥐여졌을 테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태극기 중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현재 4종으로, ‘김구 서명문 태극기’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2종, 그리고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가 그것이다.
‘ 한국 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 가 만들어진 과정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韓國 光復軍 書名文 太極旗)’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원이던 문수열(일명 문웅명, 1923.7.~2008.12.)이 소장했던 것이다. 1923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문수열은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으로 건너갔다. 1944년 겨울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있던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는 광복 후까지 태극기를 고이 간직하다가 1986년 건립 추진 중이던 독립기념관에 태극기를 기증하였다.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던 문수열의 태극기는 2008년 태극기로서는 처음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크기 87.9×61.8cm,이 태극기는 임시정부가 표준안으로 제시한 국기 양식과 비교하면 태극 문양은 동일하지만 4괘는 좌우 반대 방향으로 제작되었다.) 문수열의 태극기가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라 이름 붙여진 것은 70여 명의 동지들이 태극기에 각자 서명을 했기 때문이다. 본래 태극기는 1945년 2월경(음력 1월) 광복군 동지 이정수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었다. 그러다 1946년 초 문수열이 다른 부대로 영전하게 되자, 그의 동지들이 태극기에 아쉬움을 담아 서명을 했다. 그렇게 문수열의 태극기는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가 되었다.
 
한국광복군 대원들. 한국광복군은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장 독립군이다.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가 만들어지게 된 경위는 좌상단에 쓰여 있는 “大韓民國 卄八年 一月 十日 蚌埠第二區隊附 文雄明 榮轉紀念 “第二區隊 一同”이라는 문구를 통해 일부 짐작할 수 있다. 태극기가 제작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태극기에 서명이 담긴 것은1946년 1월 10일이다. 문수열은 중국 안휘성 방부(蚌埠)에 주둔한 광복군 제2구대 소속이었는데, 해당 지역은 광복군 제3지대 주둔 지역이었다. 때문에 문장에  적혀 있지 않지만, 그가 광복군 제3지대 제2구대 소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웅명이라고 이명을 쓰던 그는 다른 부대로 영전하게 되었고, 이에 제2구대원 일동이 기념으로 태극기에 서명했다.
    1940년 9월 17일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중국에 있던 청년 독립운동가들을 기간 병력으로 삼아 증강되어갔다. 전쟁 막바지에는 중국에 거주하거나 징용당해 온 청년을 비롯하여 일본군에 징집된 병사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규합했는데, 문수열이 있던 안휘성은 대표적인 광복군 병력 충원지였다. 광복 후 임시정부는 기존의 광복군을 확대하여 국군을 창설한 후 귀국할 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위해 일본군에 소속되었던 한인 병사들을 대거 모집하여 한국광복군 잠편지대를 조직했다.
    문수열은 전쟁기 광복군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 활동(招募活動)을 하다가 광복 후에는 일본군에 배속된 한인들을 석방하고 고국 귀환을 돕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에 서명이 담긴 1946년 1월은 중국에 있던 한인들의 고국 귀환이 가시화되던 시기로, 광복군 잠편지대 활동이 활발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01. 등록문화재 제385호 태극기 목판. 태극기를 찍어내기 위해 목재에 4괘와 태극 문양을 새긴 목판이다.
02. 등록문화재 제395-2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대한민국역사 박물관 소장).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김붕준(金朋濬,1888∼1950) 일가가 소장하고 있는 태극기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사의 국가 표상적인 맥을 담고 있다.
03.  등록문화재 제388호 김구(金九) 서명문 태극기. 바탕에 광복군에  대한 우리 동포들의 지원을 당부한 김구 선생 친필 묵서가 쓰여 져 있다.
04.  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반과 면담한 김구 주석. 삼균주의로 대표되는 임시정부의 건국구상은 광복 직후 김구 주석이 발표한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에서도 재차천명되었다.
 
태극기에 담긴 자유열망과 독립의지
    태극기에는 문수열의 광복군 동지와 광복 후 합류한 잠편지대원들의 서명이 쓰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명 중에는 건강을 기원하는 개인적인 축사 외에도 자유와 자립을 향한 메시지들이 빼곡히 쓰여 있다.
    태극기에 담긴 사람들의 의사는 고군분투와 혁명완수에 대한 의지, 자유와 독립에 대한 갈망 등으로 나뉠 수 있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함께 활동한 김영일, 김국주등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열열(熱熱)한 혁명(革命)의 투사(鬪士)가 되어라 김국주(金國柱)”라고 서명한 김국주는 일본군으로부터 천을 구해 광복군 군복을 입힌 후 무장시키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조국을 위하여 희생하자”(李昌彬),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피를 흘리자”(정종구) 등 많은 사람들이 필승과 고투를 강조하고, 자유에 대한 열망을 담기도 했지만, 현 시국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태극기에 담겼다. 혁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는 장원모(張元模)의 서명과 “피흘림 없는 독립은 값없는 독립이란 것을 자각하라!”고 외치는 안창삼의 글귀에는 이성적인 결연함이 묻어 있다. 한편 태극기에는 호기로운 구호들도 눈에 띈다. 한창보(韓昌?)와 김용린(金龍吝)은 “남자의 용기를 발휘하라”, “배달정신을 발휘하라”라는 구호를 짝지어 썼고, 함주서는 즐겁게 싸우자는 뜻으로 “명랑분투(明朗奮鬪)”라고 서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통해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사회를 실현코자 했다. 삼균주의로 대표되는 임시정부의 건국구상은 광복 직후 김구주석이 발표한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에서도 재차 천명되었다. 문수열의 태극기에도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완성(完城)하자”(고주찬)는 젊은이들의 이상이 담겨졌다. 또한 국가와 민족, 개인의 독립을 의미하는 “자주(自主) 자유(自立) 자애(自愛)”[박일(朴一)]”라는 염원도 한 여백을 채웠다.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에는 광복군을 비롯한 동지들의 의리와 자유 열망, 독립 의지가 서명되었다. 광복의 환희와 미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민족 자립에 대한 결연함을 태극기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서명자 대부분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하지만 냉전의 과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국가 상징물인 태극기의 흰 여백은 그 시대 사람들의 소망과 염원으로 채워지곤 했다. 자유와 자립 등으로 채워진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를 보며 생각해본다. 이 시대 태극기의 여백에는 무엇이 담길 것인가. 후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