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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형식 위를 수놓은 즉흥의 선율

2019-09-06

문화 문화놀이터


격식 속 자유분방함
탄탄한 형식 위를 수놓은 즉흥의 선율
'이생강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

    그가 대금을 불자 슬프면서도 경쾌한 선율이 대나무 속을 미끄러져 나온다. 한(恨)과 흥(興)이 어우러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둥글게, 둥글게 일렁인다. ‘살아 있는 대금의 전설’이자, ‘대금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생강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대나무처럼 푸르고 곧은 열정으로 일궈낸 그의 인생 이야기를 한 곡조 들어봤다.


대금으로 단 13분 만에 파리를 사로잡다
    1960년 5월, 한국민속예술단 소속 무용수와 악사 등 30여 명이 에어프랑스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민속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그중엔 스물세 살 청년도 있었으니, 당시 최연소 단원이었던 이생강 보유자다. 
 
‘대금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생강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춘향전을 무용극으로 공연해야 했는데 갑자기 주인공을 맡은 안나영 씨가 맹장수술을 하게 됐어요. 그로 인해 13분가량 공백이 생겼고, 제가 그 공백을 메우게 됐습니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대금을 들고 무대로 나아갔습니다. 사실 무슨 정신으로 연주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다만, 그 순간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 인생 최초의 대금산조 독주회였는데 지금까지도 가장 잊을 수 없는 무대예요.”
    벌써 60여 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이를 회고하는 이생강 보유자의 눈빛은 형형하기만 하다.
    실력으로만 평가받는 엄정한 무대 위에서 온 마음을 담아 연주했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기 때문이다. 단 13분의 연주, 그것도 사전에 아무 준비 없이 갑작스레 서게 된 무대였으나 다음 날 프랑스 신문엔 그의 대금 연주에 관한 호평이 가득 실렸다. 사람들은 그의 대금 안에 무슨 기계장치라도 있는 게 아닌지 들여다봤고, 텅 비어 있음을 확인한 후엔 찬사를 보냈다. 
    “외국인들의 눈엔 대금이란 악기가 마냥 신기했나 봅니다. 대나무에 구멍 몇 개 뚫은 게 다인데 어쩌면 이렇게 좋은 소리가 나느냐며 깜짝 놀라더라고요. 파리에서의 무대 이후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전통음악과 대금에 대해 알렸어요.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면서 우리 음악에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대금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품은 악기인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격변의 시기, 마음을 어루만진 우리의 가락
    이생강 보유자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 민속예술제에 참가했다. 1972년엔 뮌헨올림픽 공연을 마친 후 4개월 간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를 순회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전 세계 50여 개국의 무대에 올랐으며, 국내외 공연기록이 천여 회에 이른다.
    이생강 보유자는 어떻게 대금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그 시작을 헤아리려면 70년이 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37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본적지는 경남 울주군이지만, 5대 독자이셨던 아버지께서 징용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셨거든요. 아버지께서는 늘 고향을 그리워하셨어요. 고향의 소리가 듣고 싶다며 직접 피리를 만들어서 불기도 하셨죠. 특히 깊은 밤 단소를 불면서 눈물을 흘리셨는데, 전 그런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드리면서 자연스럽게 단소를 불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다섯 살 때였는데, 제 소리를 들은 아버지께서 단소 부는 법을 알려주셨거든요. 뭔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끼셨나 봅니다.”
 
01. 산조연주에 쓰이는 대금은 시나위나 남도무악 등 다양한 가락을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02. 산조대금은 대금산조 독주를 위해 만들어진 악기로, 손가락을 짚는 지공이 짧아서 연주자의 능력과 개성에 따라 자유자재로 곡을 표현할 수 있다.
03. 이생강 보유자와 신관웅 재즈 피아니스트가 함께한 콜라보레이션 무대(2016 여우락 페스티벌쇼케이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던 시대였다. 이생강 보유자는 ‘아버지에게 피리는 울주 고향마을에서 유독 많이 자랐던 대나무를 떠올리게 했다’고 덧붙인다. 구슬프면서도 흥겨운 피리소리는 고향에서 보내온 애틋한 전언과도 같았으리라. 이는 이생강 보유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8살 때 일본을 떠나 부산으로 온 그는 우리말이 서툴러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곤 했다. 서러움에 뚝뚝 눈물 흘리던 그를 위로해준 건 그간 아버지께 배워 익혀온 피리와 단소 등의 국악기였다.
    “아버지께서는 부산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셨는데, 어느 날 저를 건어물 트럭에 태워 전라도까지 가셨어요. 저의 음악 스승을 찾아 예인들이 많다는 전라도를 택하신 거죠. 정말 신기하게도 첫 도착지였던 전주역에서 대금산조의 명인, 한주환 선생을 만났습니다. 우연히 제가 태평소를 연주하는 걸 보신 선생이 두루마기 소매에서 대금을 꺼내셨어요. 그날부터 21일간 역 근처 여인숙에 머물면서 선생께 대금산조 자진모리 가락을 배웠습니다.”
    이후 이생강 보유자는 6·25 전쟁을 거치며 대금의 한주환, 퉁소의 전추산, 태평소 시나위의 김문일 등 훌륭한스승에게서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다. 한주환 선생을 포함해 팔도에 흩어져 살던 최고의 예인들이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열심히 실력을 쌓은 이생강 보유자는 1950년대 말부터 각 지역 민속음악경연축제에서 상을 휩쓸며 대금 연주의 명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또한 대금뿐만 아니라 피리와 태평소, 소금, 단소, 퉁소 등 여러 관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대금산조, 기품을 품은 자유로운 선율이여!
 “대금산조는 대금으로 연주하는 산조를 뜻합니다. ‘산조’란 장구 반주에 맞추어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독주 형태의 음악을 말해요. 대금의 종류엔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이 있는데, 정악대금은 주로 궁중음악을 연주하려고 만든 악기로 다른 악기와 합주하기에 적합합니다.
    산조대금은 대금산조 독주를 위해 만들어진 악기로, 손가락을 짚는 지공이 짧아서 연주자의 능력과 개성에 따라 자유자재로 곡을 표현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정악대금을 인쇄체, 산조재금을 필기체에 비유합니다.”
    그에게 대금은 ‘끝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는, 기품 있는 악기’다. 우리네 역사와 선조의 얼이 함축되어 있으면서도, 자연과 사람의 소리에 가장 가까운 음을 내는 대금. 그 청아하고도 신비로운 선율을 마음껏 표현하기 위해 이생강 보유자는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음악에 매달렸다. 대금산조의 기본 형식을 익히고자 혹독하게 연습했고, 오랜 노력 끝에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 대금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이생강 보유자의 저서들

    “저도 젊었을 땐 최고의 연주자가 되겠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대금을 정말 잘 불고 싶단 욕심이 가득했죠. 하지만 지금은 듣는 이의 마음에 가 닿는 음악, 감동을 주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바람입니다. 야외에서 공연할 때 일어서서 연주를 하는 것도, 멀리 있는 관객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예요. 연중 130회 이상 무대에 오르지만, 같은 식으로 연주를 하지 않는 것도 그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정서를 담아 전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금의 아버지’, ‘살아 있는 대금의 전설’, ‘우리시대의 악성’ 등 그를 수식하는 화려한 말들은 많다. 이생강 보유자의 삶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인터뷰를 위해 직접 만난 그는 ‘듣는 이를 향해 오롯이 마음을 다하는 연주자’였다. 우리네 삶에서 국악이 멀어진 서글픈 시대, 일부러 국악 무대를 찾아 준 관객들에게 그 순간의 흥과 멋을 대금 가락에 실어 보내는 이생강 보유자. 내년이면 대금을 분 지 꼭 80년이 된다는 그가 전하는 깊고 진한 진심의 선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