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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가 숨 쉬는 궁궐

201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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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가 숨 쉬는 궁궐
'창경궁'

    궁궐은 왕이 머무르면서 나랏일을 보는 곳으로, 국가의 상징이자 왕의 위엄을 과시하는 공간이다. 조선왕조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다섯 궁궐이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그것이다. 오늘날 이들 궁궐을 일컬어 '5대궁궐'이라 부른다. 이 중 사적 제123호 창경궁은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다른 궁들과 함께 조선시대 역사를 살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유적이다. 


동쪽을 향해있는 별궁
    창경궁은 창덕궁 동쪽과 접하고, 종묘의 북쪽과 연결되어 있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고 있다.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이다. 1418년 즉위한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궐이다. 이후 성종 대인 1483년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해 궁을 확장하여 지었고 이때 창경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고 있는 창경궁 전경


    창경궁은 궁궐로서의 면모와 독립적인 규모를 갖췄지만 왕이 기거하면서 국사를 돌보는 장소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궁궐 중 유일하게 동향으로 지어졌다. 남향이 아닌 동향을 택한 이유는 별궁으로 조성된 궁이기 때문으로 추측되며, 지형상으로도 동향이 적합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종 때 건립된 창경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그 내부에 세워진 건물은 정전인 명정전(국보 제226호), 편전인 문정전, 그리고 통명전(보물 제818호), 환경전, 경춘전, 양화당, 숭문당, 집복헌, 영춘헌, 함인정, 정자 건물인 관덕정이 있으며, 정문인 홍화문(보물 제384호), 명정전의 출입문인 명정문(보물 제385호), 월 근문, 선인문과 옥천교(보물 제386호), 풍기대(보물 제846호), 관천대(보물 제851호),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 등의 석조물이 있다. 
    이 중 성종 15년(1484) 창건된 명정전은 현존하는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걸고 그 위에 포작(包作)을 짜 올린 다포 양식이다. 기둥 위의 장식적인 짜임은 그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며, 그 형태가 힘차고 균형이 잡혀 있어 조선 전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고 왕이 앉는 의자 뒤로 해와 달, 5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설치하였다. 건물 계단 앞에는 신하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24개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左)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右)창경궁 명정전의 회랑(궁전 건축에서 주요 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
 
빛과 어둠, 회복의 역사
    창경궁은 역사 속에서 숱한 수난을 겪어낸 장소이다.통명전은 장희빈에 얽힌 이야기가 담긴 곳이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를 장희빈이 저주한 사건이 있었다. 갑술환국으로 희빈으로 강등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흉물을 통명전 주변에 묻었는데 이 사실이 시녀들의 자백에 의해 밝혀지게 된다. 이에 크게 화가난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다.
    또한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도 바로 창경궁이다.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 왕세자의 즉위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다가 노론의 대신들이 죽음을 당한 사건이 동궁 처소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였는데, 당시 세자가 갇힌 뒤주는 궁내 선인문 안뜰에 있었다.
    창경궁도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이에 광해군 7년(1615) 주요 건물들의 재건을 시작하여 광해군 8년(1616) 마무리했는데, 그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재건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창덕궁과 인접해 있었기에 조선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화마가 창경궁을 덮쳤다. 인조 2년 (1624) 이괄의 난과 순조 30년(1830) 대화재로 내전이 소실되기도 했다.
 
01.창경궁 명정전의 귀공포    02.창경궁 명정전의 월대답도    03.숙종이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 장소인 창경궁 통명전의 내부 현판


    일제강점기에도 수난을 피치 못했다. 일제는 1909년 궁내 전각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 이왕가 박물관을 궁내에 설치했다. 1930년대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설치하여 주변 환경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춘당지라는 연못을 파고 연못가에 정자를 지었으며 궁원을 일본식으로 변모시켰다. 훗날 1983년 동물원 및 식물원의 관람을 폐지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시켰다. 이듬해인 1984년 수정궁 철거가 이뤄졌으며 1986년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