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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화물열차역과 한인 강제이주의 역사

20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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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현장, 투쟁의 기록
블라디보스토크 화물열차역과 한인 강제이주의 역사
'하루아침에 한인 17만여 명이 강제이주되었던 통한의 역사(歷史)'

    블라디보스토크는 모스크바에서 9,198km거리 떨어진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종착역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이곳은 한인 17만여 명이 하루아침에 6,000여km를 내달려 강제이주되던 출발 역사(驛舍)가 있는, 통한의 역사(歷史)를 간직한 곳이다. 1937년의 한인 강제이주는 9월 10일부터 라즈돌리 노예, 스비랴기노, 골렌키 등 간이역의 수송 열차에 태워져 이주되기 시작하였고, 9월 15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이주민들이 집결되어 타슈켄트로 떠났다.
 

1937년 고려인 강제 이동 경로
 
강제이주라는 극단적 조치의 배경
    1937년 8월 21일 소련 정부인 인민위원회의와 집권당인 全러시아공산당(볼)은 공동으로 “극동변경주 국경지역 한인주민 추방법”을 제정하다. 당정 합동으로 결정한 법에는 한인을 강제로 삶의 터전에서 퇴거시킬 조치와 이주 방식이 상세히 규정되었다. 법률 명칭에서 드러나듯 이주 대상은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한인주민들이며 국경의 안전을 강화하고 국경 넘어 들어온 일본 첩보원의 활동을 방지하겠다는 의도였다. 이것이 17만 2000여 명의 한인을 강제이주시킨 명령이었다.
    당시 소련은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가 공격해 들어올 것을 경계하였다. 특히 극동에서는 일본의 대외 팽창정책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1931년 류저우사건을 도발한 일본은 1932년 위성국가 만주국을 설립하여 소련과 국경을 접하는 등 자신의 향력을 확대하였다. 1936년 6월에는 「제국방위방침」을 정하여 소련과 미국을 제1순위 적국으로 선언하고 독일과는 반공조약을 맺어 소련을 압박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1937년 일본은 북경에서 발생한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국 대륙으로의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일본의 대외 팽창을 인지한 소련은 공산당 정치국(Политбюро КПСС) 산하에 극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지속적으로 극동지역의 안보 상황을 점검하였다. 특히 한인문제를 포함한 극동지역의 정세 안정문제, 특히 일본 관련 정책을 도 밀도 있게 다루었다. 소련은 국경 안전을 위해 이미 1936년 초 서부지역인 핀란드, 폴란드 국경지대에서, 1937년 7월 남부지역인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국경지대에서 주민을 퇴거시키거나 접경금지구역을 설정해 독일이나 영국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 연장선에서 소련은 동부지역인 극동지역에서도 한인주민 퇴거조치를 전개한 것이다.
    극동지역에서 한인을 이주시킨 명분으로 중앙아시아 불모지 개척을 위한 유용한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중앙아시아의 공화국은 생산력 증대를 위해 토지개척 및 쌀생산정책을 시범적으로 운용했었고 농업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한인을 극동에서 초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적 조치를 선제적으로 추진했다 하여 1937년 전개된 집단적 대규모 이주의 본질을 설명할 순 없다. 1937년 한인 강제이주, 그것도 집단적 이주는 매우 일방적이었으며 불합리한 결정이었기에 추가적인 근거가 필요했다.
    한편 중국에서는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국 내륙으로 침략해 들어오자 국민당정부는 중국공산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했다. 중국의 이념을 둘러싼 정파 간의 갈등이 항일문제를 넘어설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나왔다. 더 나아가 국민당정부는 종소상호불가침협정을 맺어 소련과의 연대를 강화하다. 이 협정이 맺어진 날은 바로 소련정부가 한인을 극동지역 국경지대에서 추방하겠다고 결정한 8월 21일 바로 그날이었다. 소련은 국내적으로 서남부에서부터 추진해오던 국경지대 소거작업을 동부에서도 추진했으며, 국외적으로는 항일 연대를 강화하여 침략에 대비한 것이다.

 
(左) 페르바야레츠카역의 선로      (右) 페르바야레츠카역 뒷모습(2018년) 
 
한인 강제이주의 진행과정
    한인이주를 명받은 내무인민위원부 극동지부는 교통인민위원부의 지원을 받아 실행에 옮겼다. 교통인민위원부가 작성한 수송열차 운행표에 따르면 한인들은 대략 골렌키, 크노리노, 스비랴기노, 라즈돌리노예 그리고 노보 벨리마노프카 등의 역으로 소집되어 후송되었다. 이곳으로 집결된 한인들은 인원점검을 받고 출발하다. 블라디보스토크(페르바야레츠카역)의 경우 9월 15일 출발하다. 수송열차 운행표에 따르면 행선지는 타슈켄트였다.
    지역에 따라 늦게 출발한 곳도 있었다. 갑작스런 명령에 준비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가장 애통한 것은 당시 추수기가 임박한 상황에서 콜호즈는 가을걷이를 마치고 떠나라 하였다. 이주민들은 추수한 식량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떠났다.
    우수리스크 지역 스비랴기노역의 경우 한인 이주상황은 주집행위원회가 지구당위원회에 보고한 내용에 명확히 정리되었다. “첫 번째로 한인 이주민 3000명을 실은 열차가 1937년 9월 9일 스비랴기노(Свирягино)역을 출발해 엄격한 질서 속에 스파스크지구의 크노리노(Кнорино)역으로 향했다.” 그 후 이주조치는 23일까지 지속되었는데 약 11,807명이 열차에 20∼30명씩 과적 수용되었다.
    특이한 사실은 차량 중에는 ‘교사차량(учител ьский вагон)’을 두었다는 점이다. 이들에 대한 특별관리, 즉 통제를 용이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첫 열차가 떠난 시간은 익일 새벽인 6시 5분이었다. 이주될 한인의 명단을 확인하는 작업이 그만큼 지연되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급작스레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최초의 한인 강제이주 법률이 발표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1937년 9월 28일, 두 번째 법령이 발표되었다. “극동변경주 지역에서 한인추방법”이 그것이다. 이때는 1차 한인 퇴거작업이 일단락된 시점이었다. 이번 법령은 인민위원회의 단독으로 발표되었으며, 국경지역을 넘어선 후방 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을 추방한다고 적었다. 
    특히 내무인민위원부는 극동지역의 한인을 남겨두는 일이 매우 위험하며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일본 측 첩보원’ 집단을 반드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인 사회가 적국의 활동기지인 ‘제5열’에 해당된다는 인식이었다. 이때 대상이 된 후방지역은 연해주의 국경지대 이외의 지역, 즉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 전 지역, 하바롭스크, 니콜라옙스크 그리고 사할린 일부가 포함되었다.

 
(左) 1921년 당시 홍범도. 홍범도는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등을 역임한 독립 운동가로,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강제이주 대상이었다.
(右) 1937년의 한인 강제이주가 있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 중 페르바야레츠카역은 당시 역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두 번째 실행된 이주조치에 따라 10월 3일까지 한인들이 추방되었다. 이때 추방대상 인원은 계획상 24,000명이었는데 실제로는 75,000여 명으로 초과 달성되었다. 가능한 빨리, 가능한 많이 그리고 가능한 적은 비용을 들여 추방하려는 행정목표가 엄격히 추진된 결과다. 이에 따라 부작용이 많이 노출되었다. 열차의 목적지가 정확하지 않았고 현지에서는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곧 닥칠 겨울을 대비하여 가재도구나 의류, 식량 등을 챙기지도 지원되지도 않았다. 그에 따라 이주민들은 이동과 초기 정착과정에서 상당수 희생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주거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토굴이나 움막에서 지냈다. 도시 인근에 내동댕이쳐진 이주민들은 도심지로 들어가 차이하나와 같은 곳에서 이슬을 피하며 밤을 지새웠다. 난민 그 자체다.
    이 같은 악조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1937년 10월 14일 제3차 한인이주가 이어졌다. 31대의 수송열차로 9,284가구 약 4,500여 명이 이주되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승객 편성이 사전에 이루어지지 않아 집결된 이주민을 열차 배정하는 데서부터 무질서와 혼란이 있었다. 열차시간표는 자주 바뀌어 더욱 불만이 쌓다. 수송열차는 화물차량이 대부분이라 좌석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며 차량도 정비되지 않아 긴급수리로 인한 지체 현상이 길어졌다. 차량 내부의 위생상황은 불결했고 제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빽빽한 수송인원, 오랜 이동시간에 불편한 생리현상 등으로 아비규환을 연상시켰다. 노약자나 어린이 중에서 사망자가 나타났고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한인추방 작전이 완료되자 내무인민위원장 예조프가 인민위원회의 의장 몰로토프에게 서한을 보내 보고하였다. “1937년 10월 25일 극동변경주에서 한인을 추방하는 일이 마무리되었다. 앞서 통지하듯이 총 124개 차량에 3만 6,442가구 17만 1,781명의 한인이 소거되었다. 극동변경주 캄차트카나 오호츠크에 남아 있는 특별이주민은 모두 700명 정도인데, 당해 연도 11월 1일 준비된 차량으로 추방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 보고 이후에도 한인 퇴거 작업은 계속되어 17만 2600여 명이 강제이주되었다.
    1937년의 한인 강제이주가 있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 중 페르바야레츠카역은 당시 역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땅이자, 수난에도 숭고한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