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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환생한 풍요(豊饒)와 길상(吉祥)

20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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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환생한 풍요(豊饒)와 길상(吉祥)
'전통과 미디어 기술의 만남'

    서양의 송년 음악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이 빠지지 않는다면, 국악계에서는 매년 새해 첫 음악회에서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한다. 세종대왕이 ‘백성과 함께 즐기는 음악’이라는 뜻을 담아 지은 ‘여민락’의 의미와 더불어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바람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같은 맥락에서 미디어 아티스트 김혜경 작가는 ‘미디어 여민락’을 통해 첨단 미디어 기술로 전통문화에 담긴 풍요와 길상의 메세지를 감각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는 오래된 전통
    지난해 2월, 미국 워싱턴DC 스미소니언 프리어새클러 갤러리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감탄사로 술렁거렸다. 워싱턴 한국문화원에서 주최한 미디어 아티스트 김혜경 초대전 ‘시공을 넘어선 문화(The Culture of Time and Space)’를 본 관람객들 사이에서 ‘와’ 하는 탄성을 시작으로 전시작품과 그 배경이 된 전통문화에 대한 질문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진 것이다.
    실제로 김혜경 작가의 전시는 규모는 작았지만 매우 특별한 전시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 특별함이란 한국과 동아시아 고 미술사를 모티프로 삼았다는 점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새로운 표현기법이 더해지면서 완성되었다. 즉 움직이는 영상과 미디어 매체에 익숙한 세대들과 쉽게 소통하기 위해 프로젝션 맵핑 기법(Projection Mapping.건물이나 물체 같은 곳 표면에 영상을 투사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가상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 또는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Interactive Media Art.관객의 특정 행위를 감지해 이에 따라 작품이 반응하는 기법) 등 첨단 기술의 힘을 적극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붙은 수식이었다. 이는 박물관에서 과거형으로 박제되어 있던 전통에 가장 새롭고 현대적인 빛과 사운드, 움직임을 부여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시공을 초월하는 예술적 소통을 시도해온 김혜경 작가의 작품에 두루 스며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미디어 여민락’은 프로젝션 맵핑 기법으로 전통 오브제, 도자기, 가구, 그림, 의상 등에 담긴 다양한 문양의 아름다움과 복(福)을 상징하는 메시지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다.


 
전통 문양에 담긴 다양한 복의 기원
    ‘여민락’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이 우리 음악의 독창성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만든 곡으로, 우리는 매년 새해 첫 음악회에서 이 곡을 연주한다.
    전통음악이 연주로 ‘여민락’의 정신을 잇는다면, 미디어 아티스트 김혜경은 예술작품에 ‘여민락’을 녹여냈다. 백성과 함께 즐기는 음악처럼, 자신의 예술작품이 관객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당해온 동아시아 고 미술사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즐겨주길 바라는 마음을 바탕에 깔아놓은 것이다.
    “우리는 동양인이고 잠재의식 깊숙이 동양철학을 기반으로 살아왔음에도 서구적인 것에 더 호의적인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만의 전통을 되새김질하다보면 서구문화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우리만의 정체성을 창조의 밑거름으로 삼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左) MEDIA 臥遊(Enjoying the scenery lying in a room), 2013(100cmx200cmx60cm) 
(右) Media 多寶格 Unit 5(Chinese Studiolo), 2019(60cmx60cmx5cm)
 
전통과 첨단의 결합으로 새로운 창조를 빚는 미디어 아트
    ‘미디어 여민락’은 고 미술 중에서도 특히 우리 전통문화와 문화재 안에 스며있는 문화적 상징 기호들로 표현된 풍요와 길상의 코드에 주목했다. 문과 창살의 문양, 병풍 속의 모란, 분청사기에 새겨진 물고기, 혼례복과 일월오봉도 곳곳에 배치된 다양한 기원을 품은 문양들을 디지털 미디어 기법으로 소환해냄으로써 물질문화를 추종하는 현대인의 삶을 돌아보는 한편 자연에 합일하고 스스로를 성찰했던 전통 사상을 환기하고자 한 것이다.
    고 미술에서 차용해온 다양한 패턴의 문양은 전원이 켜짐과 동시에 현대적인 테크놀로지와 한 몸을 이루어 LED 월을 캔버스 삼아 영상의 아름다움에 몰입하게 만든다. 전통과 첨단 미디어 기술의 결합이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던 보물을 21세기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생물로 환생시키는, 미디어 아트의 기능과 매력이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미디어 여민락’처럼 전통적 요소와 첨단 미디어 기술의 결합은 전시공간을 떠나 다양한 장소에서 시도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립국악원이 무대에 올린 무용극 ‘처용’은 미디어 아트와의 접목으로 주인공들의 심리와 감정선을 한층 섬세하고 극적으로 표현했다. 전주의 전동성당은 130주년을 맞아 2018년 성당 외벽에 미디어 파사드 공연을 선보인 데 이어 지난해 말에는 성당의 아치형 천장을 스크린 삼아 180도 파노라마 뷰로 ‘빛의 성당 FIAT LUX(빛이 있으라)’라는 제목의 공연을 선보였다.
    또, 문화재청은 지난해 수원 문화재야행에서 화성행궁 내 주요 건축물을 미디어 파사드로 수놓았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2월 10일부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내 해양유물전시관에서 고려시대 난파선과 함께 수장된 고려청자 등 수중문화재를 미디어 아트로 재해석한 영상을 선보이고 있다. 제각각 전통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다를지언정 미디어 아트라는 첨단 기술을 활용해 박물관이나 책에서 접했거나 기록만 남아있을뿐 형체는 유실된 전통에 아름답고 감각적인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현대인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미디어 아트의 역할이 점차 활발해지는 것은 비교적 쉽게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넓힐 수 있다는 점, 디지털 복제의 시대인 만큼 한 작가의 작품을 동시에 여러 곳에서 전시할 수 있다는 점, 전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첨단 기술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는 만큼 새로운 기술 개발과 더불어 미디어 아트의 결과물도 진화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미디어 아티스트 김혜경은 과거와 현재의 시공을 초월하는 예술적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현재 미디어 아트는 새로운 기술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어 그 정의조차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많이 활용되는 미디어 파사드와 프로젝션 맵핑 외에도 관객의 특정 행위를 감지해 이에 따라 반응하는 ‘인터렉티브 아트’, 작품 자체가 움직이거나 움직이는 부분을 삽입한 ‘커넥팅 아트’, 디지털 기기를 통한 조각과 회화 등을 의미하는 ‘디지털 아트’, 디지털 기기에서 표현되는 영상인 ‘비디오 아트’ 등이 미디어 아트의 영역에 속해 있다. 그만큼 기술에 따른 표현 기법과 방식이 다양하다는 의미일 터. 다만 일부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미디어 아트와 예술작품의 접목 시 절제미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2019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개폐회식에서 미디어 아트를 접목한 무대디자인으로 뜨거운 호응을 얻은 윤정섭 감독이 ‘뉴미디어는 아날로그 뒤에 숨어야 한다’고 강조했듯이 뉴미디어가 아날로그와의 오버랩을 욕심내면 감정이 오롯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현대미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장르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첨단 미디어 기술과의 접목으로 예술적 상상력을 현실로 실현하는 미디어 아트는 실험과 새로움, 대안의 의미를 지니며 광범위하고도 빠르게 그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특히나 전통과 첨단 미디어의 결합은 두 시공이 허물어놓은 경계를 캔버스 삼아 과거와 현재의 감각적인 만남을 부지런히 움 틔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