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17세기 최고의 시인이자 문장가

2020-02-18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충북문학기행
17세기 최고의 시인이자 문장가
'증평 김득신 시인'

    1604년에 태어나 1684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81년의 생을 통틀어 1천500편이 넘는 시를 남긴 김득신,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다. 그가 남긴 180편이 넘은 글은 그를 조선 8대 문장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만 번 이상 읽은 문장이 36편이나 되는, 독서왕 김득신은 17세기 최고의 시인이자 문장가이기도 했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 율리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시인 김득신의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섰다.


 
문학기행 출발지 김득신 문학관
    ‘나는 내 마음을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았으며 말을 함에 반드시 간략함을 따랐고 실천하였으며 권세 있는 자와 부유한 자의 문전으로 달려가지 않았으니 이것이 일생을 지낸 마음의 자취이다.’ 
    김득신의 묘비문에 새겨진 문구처럼, 청렴한 그의 마음을 닮은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을 이고 도착한 곳은 충북 증평군 증평읍 송산리에 있는 김득신 문학관이었다. 김득신 문학관은 그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문학기행의 출발장소로 제격이었다. 
    김득신 문학관은 그의 생애와 생의 결실 중 하나인 그의 시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곳으로, 문학관 전시 안내문구와 터치스크린 등 여러 시설물을 통해 김득신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재미있게 풀어볼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후유증으로 머리가 아둔해지고 건망증이 생겨 또래 보다 느린 10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39세에 사마시 진사과에 합격하고 59세에 이르러 증광시(조선 시대에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 문과에 급제하게 된다. 39세에 사마시 진사과에 합격한 감회가 깊었던지 그는 그 내용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김득신이 시를 처음 지은 것은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는 그 시를 외삼촌에게 보여줬고, 외삼촌은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북두성은 난간에 걸려 있고 달빛은 하늘에 가득한데/석조는 가을 색 깊어 차가운 안개에 잠겼어라/예로운 국화는 만발하였고 술항아리도 그대로이니/그 옛날 도연명이 여기에 있는 듯 하네]
    그는 이 시를 시작으로 1684년 81세로 숨을 거두기까지 1천500편이 넘는 시를 남겼다. 그리고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혔다. 또 그가 남긴 180편이 넘는 글은 그를 조선시대 8대 문장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런 김득신에 대해 적은 책 <호보>, <동시화>, <시평보유>, <순오지> 등이 문학관 전시실에 진열됐다. 만 번 이상 읽은 36편의 문장에 대한 기록을 남긴 독수기(책을 읽은 기록)도 볼 수 있다. 김득신은 독수기에 ‘백이전, 노자전, 분왕을 읽은 것은 글이 드넓고 변화가 크기 때문이었으며, 유종원의 문장을 읽은 이유는 정밀하기 때문이었다. 한유의 글을 읽은 것은 그 광대함이 넘쳐흐르면서도 농욱하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김득신의 문집인 백곡집도 전시됐다. 김득신 10대 손이 기증한 것이다.
 
(左) 김득신 문학관에 전시된 백곡집     (右) 율리에 있는 김득신 묘
 
율리에 있는 김득신의 묘를 찾아서
    김득신 문학관을 나와 그의 묘가 있는 율리로 향했다. 별천지 공원 부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김득신 묘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걸었다. 이정표에는 묘까지 400m 라고 적혀있었다. 
김득신 묘 바로 옆에 작은 쉼터가 있다. 김득신을 소개하는 문구와 그림이 새겨진 벽과 시비가 있다. 김득신을 소개하는 문구에는 태몽에 노자가 나타난 터라 대학자로 성장하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지만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아둔한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김치는 아들을 격려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게 도왔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득신의 뒤에는 그런 아버지가 있었던 것이다. 묘 바로 옆 시비에는 그의 시 <밤티골>이 새겨졌다. 
    김득신의 묘비명에 적힌 글의 한 구절이 그를 잘 보여 준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려있을 따름이다.] 그는 그렇게 꾸준한 노력으로 대기만성이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 되었다. 
    정약용은 김득신을 두고 ‘글이 생긴 이래 상하 수천 년과 종횡 3만 리를 통틀어 독서에 부지런하고 뛰어난 이로는 백곡을 제일로 삼아야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전한다.  
    김득신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진주목사 김시민의 손자이기도 하다. 아버지 김치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아버지 김치의 묘 아래 김득신의 묘가 있다.
 
(左) 삼기저수지 둘레길에 있는 김득신과 아이의 상     (右) 삼기저수지 둘레길에 있는 책 읽는 김득신 상
 
별천지 공원과 삼기저수지 둘레길을 걷다
    김득신 묘에서 다시 마을로 내려와 별천지 공원 앞에 섰다. 별천지 공원과 그 주변에도 김득신의 이야기를 담은 설치물들이 많다. 
    길가 담장에서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 만화를 볼 수 있다. 별천지 공원에는 다양한 모양의 조형물이 있는데, 그중 김득신의 시를 새겨 놓은 조형물 앞에서 그의 시를 읽는다. <춘수>, <구정>, <두타산>, <여관야음>, <만음>, <호행절구>, <용호> 등의 시를 볼 수 있다. 그중 <춘수>를 적어 본다.
    [귀 등에서 봄잠이 곤하여/꿈속에서 푸른 산을 지나간다./깨고서야 비가 온 줄 알았으니/개울물에 새로운 소리가 들린다.]
    맑은 성정이 묻어나는 그의 시 한 편에 읽는 사람의 마음도 맑아진다. 그런 마음으로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김득신 문학기행의 마지막 코스인 ‘삼기저수지 둘레길’이다. 
    삼기저수지 물가에 서 있는 석조관음보살입상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부처상 앞에 선다. 고려시대 불상이라고 하는데 마모가 돼 얼굴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부처상을 지나 저수지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크길로 접어든다. 그 길에 김득신의 시비와 상이 여러 개 있다. 처음 만나는 시비에는 그의 시 <두타사>가 새겨졌다. 
    [일부러 두타의 옛 절을 찾아오니. 경치 구경에 빠져 갈 길 몰라 하노라/층층 바위엔 학 떠난 지 오래고/오직 벽도화만 혼자서 피었어라/지친 눈 비비며 위태로운 곳에 의지하니/바로 이 맑은 가을 송옥의 슬픔 자아낸다./한낮 협곡엔 천둥치고 캄캄하니/신령스런 못엔 아마도 독룡이 왔나보다.] 
    절창이다. 그의 시에 마음이 움직이니, 그것이 감동이다. 시 한 편에 내딛는 걸음도 의미가 깊어지는 듯하다. 그렇게 그 길에서 만난 다음 시는 <밤티골 가는 길에>였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앉아 책을 보는 모습을 형상화한 상이 있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차운하다>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새겨진 시비를 보고 저수지 제방 위로 난 길 따라 걷는다. 저수지 가에 세운, 책 읽는 그와 어린 아이가 함께 있는 상을 마지막으로 문학기행을 끝낸다. 돌아가는 길 자꾸만 그의 시 <두타사>의 마지막 구절이 입에서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