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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근노인

2020-03-18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소설>
반근노인
'글. 박순철'

    “이 고사리 얼마요?”
    “예, 1kg에 4천 원입니다.”
    “반 근(300g)만 줘요”
    헐렁한 옷차림의 할아버지! 며칠 전부터 이곳 광주농수산물 시장에 나타나기 시작한 인물이다. 이 가게 저 가게 다니면서 많이도 아니고 그저 반 근씩 물건을 사가는 기이한 노인, 이곳은 도매시장이기에 상자 단위이거나 1kg, 아니면 2kg씩 포장되어있어서 조금씩 덜어서 파는 것은 성가시다.
    하루는 대명상회 김 기사가 노골적으로 귀찮은 기색을 보였다.
    “할아버지, 시장에 나오기 힘든데 한꺼번에 많이 사다 놓고 조금씩 잡수세요.”
    “많이? 아니야, 나는 할망구 하고 둘이 살아, 그래서 많이도 필요 없어. 이렇게 시장에 나오면 사람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쐬고 좀 좋아.”
    노인 얼굴에 살포시 내려앉은 주름살이 그 말을 증명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이미 귀찮은 존재로 낙인이 찍혀가고 있었다. 대명상회 외에도 고사리나 도라지 등 농산물을 취급하는 곳이 다섯 집이나 된다. 대명상회를 제외하면 어느 가게에서도 노인을 살갑게 대하는 곳이 없었다. 이제 시장에서 노인은 ‘반 근 노인’으로 불린다.
    대명상회도 처음에는 노인을 홀대했었다. 아침 시간은 몹시 바쁘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와서 조금씩 사겠다고 하는 것은 귀찮을뿐더러 큰 손님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장도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리고 조금씩은 팔지 않으려 했다. 연세 많은 노인이고 또 돌아가신 아버지 같이 느껴지기도 해서 그냥 드리는 셈 치고 반 근씩이라도 팔곤 했는데 이제는 단골이 되었다.



    그러나 노인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건을 사면 꼭 확인하고 돌아갔다. 김 기사는 그 노인이 들어오면 아예 저만큼 떨어져 딴청을 피우곤 했다. 그러면 노인은 손으로 일일이 만져보며, ‘오늘은 조금 덜 삶아졌군, 아니면 오늘 잘 삶아졌어.’ 꼭 참견했다. 
    노인의 괴팍한 성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아니했다. 고사리나 도라지를 취급하는 다섯 집을 모두 돌아다니며 일일이 만져보고 참견했다. 어느 가게에서는 팔지 않겠다며 오지 말라는, 박절한 말까지 할 정도로 귀찮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시장에 나오면 모두 확인한 다음에야 예의 그 반 근을 사서 돌아갔다. 
    광주농수산물 시장 인근에 전국 가맹점을 거느린 커다란 식품회사 ‘무등’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곳에서는 한식 재료를 가공해서 전국에 공급할 계획이라고 했다. 시장 경기가 나빠서 울상 짓던 상인들로서는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그 회사에 납품하게 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란 소문도 나돌았다. 하지만 계약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공개경쟁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이라는 점이었다. 수의계약 공고문을 살펴보면, 최저낙찰가격을 써낸 사람이 아닌, 성실하게 장기간 납품해 줄 사람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성실하게’, ‘장기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 공고문을 낸 사람만 알 것이다. 
    대명상회 김 사장도 견적서를 작성한 다음 무등식품회사를 찾아갔다. 담당자는 찬찬히 살펴보더니 ‘최종 결정은 마감 후 물품 구매 심의위원회’에서 통보할 것이라며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장사 시작한 지 3여 년 되었지만, 경쟁자들은 이곳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그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는 가격도 kg당 400원~500원, 심지어 1,000원을 낮춰서 견적서를 낸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아예 꿈도 꾸지 않는 게 편할 성 싶었다. 
    “사장님! 저기 좀 보세요. 그 ‘반 근 노인’ 아닙니까?”
    김 기사가 가리키는 곳에는 전에 꼭 반 근씩만 사 가던 그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고 뒤에는 말쑥한 양복 차림의 젊은 남녀가 따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들의 양복 깃에는 ‘무등’이라는 글자가 찍힌 배지가 달려있었다. 그런데 예전의 노인 복장이 아니었다. 정장에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중후한 노신사였다. 
    대명상회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김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김 기사뿐 아니라 그 노인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김 기사가 달려나가고 연이어 사장도 뛰어 나갔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도 고사리 도라지 반 근 씩 드릴까요?”
    “아니에요. 이번에는 도라지, 고사리, 삶은 취나물, 마늘 각 1kg씩 주시오”
    김 기사가 어안이 벙벙해하며 시키는 대로 물건을 담아서 건네자 뒤에 있던 젊은이가 얼른 받는다. 
    “김 실장! 이 물품 성분 검사해서 이상 없으면 납품계약 체결하도록 해.”
    “네, 회장님!”
    뒤에 서 있던 여자가 허리를 굽실하며 대답한다. 
    “고사리는 누가 삶고 있습니까?”
    “제가 삶고 있습니다.”
    김 기사가 얼른 나섰다.
    “아, 그래요. 내가 그동안 조금씩 사서 계속 검사를 해봤습니다. 도라지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다만 고사리에 들어있는 수분이 조금 많은 것 같았습니다. 이 점만 신경 쓰면 좋은 제품이 될 것 같습니다.”
    “……”
    사장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인 것 같다. 물론 고사리는 김 기사가 삶고 있으니 자세한 내막은 모를 수도 있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요. 언제부터 고사리를 삶았나요?”
    “네, 고사리 삶는 일 한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그것은 저희 상회만의 노하우여서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그렇겠지. 자신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믿어보겠습니다.”
    대명상회 김 사장은 어안이 벙벙해서 김 기사와 회장을 번갈아 바라보기에 바쁘다. 
    “젊은 사장이 열심이고, 소량의 구매자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는 직원의 성실성도 좋게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가게와는 달리 성분 검사 결과가 한결같았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고요. 오늘 표본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하겠지만, 그동안 살펴본 바로는 별 이상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
    반 근 노인, 아니 무등식품 회장이 내민 손을 잡고 있는 대명상회 사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 기사는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을 애써 참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