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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

2020-03-25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자투리
'글. 한지황'

    큰형님이 네 개나 되는 큰 보따리들을 풀었다. 설을 쇠러 시댁에 온 형제들이 모두  모였을 때였다. 보따리들 안에는 색색의 천 조각을 이어붙인 무릎 덮개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나를 비롯한 동서들은 저마다 다른 색깔들로 만들어진 네 개의 무릎덮개를 감탄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많은 조각들은 조화를 이루어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보였다. 우리는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십 오년 전 아주버님이 돌아가신 후 큰 형님은 푼돈이라도 벌 요량으로 한복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큰형님의 친정 엄마는 어린 딸에게 바느질을 가르쳤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바느질이 너무 하기 싫었던 형님이었지만 막상 돈을 벌어야 할 상황에 닥치고 보니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바느질이었다.



    한복을 만들기 시작한 형님은 꼼꼼하고 얌전한 솜씨로 일거리가 많았다. 명절이 다가오면 밀려오는 주문에 더욱 바빠졌다. 그러던 형님은 규방공예까지 시작했다. 한복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손가방, 브로치, 조각보 등을 만들었다. 형님의 카카오스토리에는 색색의 천으로 만들어진 소품들이 갤러리의 예술작품처럼 전시되기 시작했다. 카카오스토리를 들여다 볼 때마다 가위로 잘려 나올 때 자투리 천이 느꼈을 소외감은 소품으로 만들어졌을 때 자부심으로 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투리 천은 나에게 전혀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내가 어릴 적 엄마는 광장시장에 자주 가셨다. 엄마를 따라 그곳에 가면 나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온갖 천들이 두루마기 휴지처럼 그러나 아주 덩치가 큰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 옆에는 팔리고 남은 자투리 천이 곱게 접혀서 쌓여있었다. 엄마는 늘 그 자투리 천 중에서 삼남매의 옷을 만들 게 있는지 살펴보셨다. 
    연년생인 오빠 둘과 작은오빠보다 두 살 아래인 나는 같은 천으로 만든 옷을 세트로 입은 적도 있었다. 엄마는 일본 잡지에 나온 옷본으로 삼 남매의 옷을 만들었다. 엄마가 옷본에 맞춰 옷감을 재단하고 나면 까맣고 작은 싱거 손재봉틀은 열심히 움직였다. 옥색 줄무늬가 있는 천으로 오빠들에게는 남방을, 나에게는 원피스를 만들어 일요일이면 함께 나들이를 나가던 때가 그림처럼 내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다.
    오빠들이 초등학교에 간 이후로 엄마는 내 옷만을 만들었다. 교복을 입었던 학교에 오빠들을 따라 나도 입학을 했지만 엄마는 딸의 외출복 만드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5학년 때쯤일까? 온갖 색들이 가로무늬로 니트처럼 짜여진 천으로 만든 원피스가 너무 특이하고 마음에 들어서 열심히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어디서도 살 수 없는 색감이 뛰어난 원피스였다. 늘 저렴하지만 개성 강한 옷을 선호하는 나를 보면 자투리 천을 싸게 사다가 손수 만들어주신 엄마로부터 받은 DNA 덕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곤 한다.



    여러 개의 취미활동에 그것도 전력을 다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하며 살 수 있느냐고 의문을 던진다. 그들이 나의 일상을 찍은 비디오를 본다면 의문이 풀릴까? 
    남들보다 하고 싶은 게 많았던 나는 하루가 30시간이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하루가 짧았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점점 더 바빠져 갔다. 일주일 스케줄이 꽉 찼고 하루에 두 탕은 기본이고 몇 탕씩 뛰는 날도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자투리 시간을 살려나갔다. 바쁘면 바쁠수록 틈새의 시간은 소중했기 때문이다.
    전철을 탈 때는 물론이고 마을버스를 탔을 때조차 신호등에 걸려 버스가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책을 펼친다. 하다못해 버스를 많이 기다리게 되는 상황에서조차 정류장에 서서 책을 펼치는 나에게 자투리 시간은 그냥 버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전철 안에서 글감이 떠오를 때는 스마트폰을 꺼내 마구 써내려간다. 그렇게 써놓은 초고는 퇴고를 거쳐 수필로 완성된다. 그 짧은 시간에 뭘 한다고 그래? 이런 생각은 떠오른 적이 없다. 
    엄마와 큰형님에게 자투리 천은 버려지는 운명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자투리 천이 있다면 나에게는 자투리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은 자투리 천처럼 버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자투리 천이 모여 조각보가 되듯이 그 짧은 시간이 모이면 무엇이든 이루게 된다. 멍하니 있다 보면 사라져버렸을 자투리 시간들이 모여서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내 몸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펴보면 시간의 자투리가 촘촘히 꿰매져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