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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2020-04-01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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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글. 유병숙'
“당신, 점심은 드셨어요?”
아버님을 향해 묻는 어머니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방금 두 분이 마주앉아 드셨으면서 그새 잊으셨나 보다.
시어머니는 도돌이표처럼 말씀을 반복하신다. 답답해진 내가 “어머니, 좀 전에도 아버님께 여쭤 보셨잖아요.” 하니 어머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가 바보라서 그래. 바보가 다 됐어.” 하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당황한 내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다. 허나, 울고 싶은 사람은 정작 나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시아버님이 나를 부르셨다. 아버님은 내 눈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네 어머니는 치매가 아니다. 그냥 건망증이 심하게 왔을 뿐이야. 그렇게 알거라.”
이 무슨 말씀이신가? 종합병원에서 치매라는 진단이 나왔고, 또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장기요양 3등급’ 판정 통지서가 날아온 것을 온 식구가 다 알고 있는데. 애써 태연한 척하시는 그 모습에서 육십여 년 동고동락해온 아내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싶은, 한 지아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당신도 노환으로 불편한 몸 일망정 아버님은 어머니의 가장 힘 있는 보호자였던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의 음식 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음식이 식탁에 올라왔다. 조리법과 상관없이 갖은 양념을 마구 넣어 섞었다. 고유의 음식 맛이 사라지고 이도 저도 아닌 잡탕 맛에 식구들은 난감해했다. 어머니는 음식 만드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일절 내색하지 않고 잘 드시는 아버님의 인내심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 앞에서 가족 누구도 감히 음식 타박을 할 수 없었다. 미식가였던 아버님을 사로잡았던 그 손맛은 이제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다.
유난히 금실이 좋았던 두 분은 늘 손을 잡고 다니셨다. 아담한 키에 중절모를 쓰신 아버님이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면 썩 보기 좋은 황혼의 그림이 그려지곤 했다. 두 분이 외출하신다고 해서 옷 입는 걸 도와드릴 겸 살짝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외투 단추를 잘못 끼워 삐뚜름하게 옷을 입고 서 계셨다. 아버님은 단추를 다시 끼워주고 스카프도 살펴주셨다. 어깨를 툭툭 쳐주며 “됐다!” 하신다. 나는 슬며시 문을 닫고 나왔다. 부부가 다정한 친구처럼 늙어가는 모습은 내가 닮고 싶은 것이었다. 머지않아 닥쳐올 내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그런 아버님께서 자리에 눕게 되자 어머니는 그림자처럼 늘 곁에 계셨다. 아버님은 당신의 다리를 주무르는 어머니와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셨다. 어머니가 빨리 털고 일어나라 채근하면 아버님은 “으샤!”하는 기합과 함께 일어나는 시늉으로 맞장구를 치며 찡긋 윙크까지 날리곤 하셨다. 기력이 약해지신 아버님께서 어느 날 남편을 찾았다. 반백의 아들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동안 고마웠다. 미안하다. 어려운 부탁이지만 네 어머니를…” 차마 말씀을 맺지 못하셨다. 대답 대신 아버지와 마주 잡은 남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며칠 후 아버님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아버님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어머니께서 흐느끼며 말씀하셨다.
“같이 간다고 하더니 혼자만 가우? 나도 데리고 같이 가요.”
하지만 이미 저승의 문턱에 한 발을 걸친 아버님은 아무 반응이 없으셨다. 아버님이 임종하시기 직전에 어머니는 갑자기 “여보, 사랑해요. 정말 고마웠어요. 마음 편히 가시구려” 하는 게 아닌가! 순간 아버님의 눈가에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고는 평온하게 숨을 거두셨다. 아버님은 생의 마지막 끈을 놓기 전에 어머니의 음성을 알아들으신 것이었다.
그 후 어머니의 상태도 빠르게 나빠졌다. 어머니는 걸핏하면 “아버지는 어디 갔수?” 하며 식구들을 놀라게 하셨다. “멀리 여행이라도 갔나?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언니! 별일 없겠지요?” 어머니는 급기야 며느리인 나를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치매는 어쩌면 극도의 슬픔을 지우는 지우개인지도 모르겠다.
아버님 근황을 물으시는 어머니가 애처로워 “보고 싶으셔요?” 하고 여쭈면 “꼭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하며 살짝 마음을 감추셨다.
“참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는데.”
아련한 눈길에 그리움이 절절했다.
아침에 목욕을 시켜드리고 어머니의 얼굴에 로션을 발라드렸더니 싱긋 웃으며 “어휴, 좋은 냄새! 언니, 나 시집 보내려우?” 하며 한껏 달뜨신다.
“멋진 할아버지 구해 드려요?” 짓궂은 내 말에 “싫어. 혹시 내 신랑이라면 모를까.”
“신랑이 누구예요?”
어머니는 얼른 아버님 함자를 대며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하신다.
귀여우신 우리 어머니! 수줍은 구십 노파의 눈동자에 생전의 아버님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아버님을 향해 묻는 어머니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방금 두 분이 마주앉아 드셨으면서 그새 잊으셨나 보다.
시어머니는 도돌이표처럼 말씀을 반복하신다. 답답해진 내가 “어머니, 좀 전에도 아버님께 여쭤 보셨잖아요.” 하니 어머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가 바보라서 그래. 바보가 다 됐어.” 하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당황한 내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다. 허나, 울고 싶은 사람은 정작 나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시아버님이 나를 부르셨다. 아버님은 내 눈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네 어머니는 치매가 아니다. 그냥 건망증이 심하게 왔을 뿐이야. 그렇게 알거라.”
이 무슨 말씀이신가? 종합병원에서 치매라는 진단이 나왔고, 또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장기요양 3등급’ 판정 통지서가 날아온 것을 온 식구가 다 알고 있는데. 애써 태연한 척하시는 그 모습에서 육십여 년 동고동락해온 아내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싶은, 한 지아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당신도 노환으로 불편한 몸 일망정 아버님은 어머니의 가장 힘 있는 보호자였던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의 음식 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음식이 식탁에 올라왔다. 조리법과 상관없이 갖은 양념을 마구 넣어 섞었다. 고유의 음식 맛이 사라지고 이도 저도 아닌 잡탕 맛에 식구들은 난감해했다. 어머니는 음식 만드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일절 내색하지 않고 잘 드시는 아버님의 인내심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 앞에서 가족 누구도 감히 음식 타박을 할 수 없었다. 미식가였던 아버님을 사로잡았던 그 손맛은 이제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다.
유난히 금실이 좋았던 두 분은 늘 손을 잡고 다니셨다. 아담한 키에 중절모를 쓰신 아버님이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면 썩 보기 좋은 황혼의 그림이 그려지곤 했다. 두 분이 외출하신다고 해서 옷 입는 걸 도와드릴 겸 살짝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외투 단추를 잘못 끼워 삐뚜름하게 옷을 입고 서 계셨다. 아버님은 단추를 다시 끼워주고 스카프도 살펴주셨다. 어깨를 툭툭 쳐주며 “됐다!” 하신다. 나는 슬며시 문을 닫고 나왔다. 부부가 다정한 친구처럼 늙어가는 모습은 내가 닮고 싶은 것이었다. 머지않아 닥쳐올 내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그런 아버님께서 자리에 눕게 되자 어머니는 그림자처럼 늘 곁에 계셨다. 아버님은 당신의 다리를 주무르는 어머니와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셨다. 어머니가 빨리 털고 일어나라 채근하면 아버님은 “으샤!”하는 기합과 함께 일어나는 시늉으로 맞장구를 치며 찡긋 윙크까지 날리곤 하셨다. 기력이 약해지신 아버님께서 어느 날 남편을 찾았다. 반백의 아들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동안 고마웠다. 미안하다. 어려운 부탁이지만 네 어머니를…” 차마 말씀을 맺지 못하셨다. 대답 대신 아버지와 마주 잡은 남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며칠 후 아버님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아버님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어머니께서 흐느끼며 말씀하셨다.
“같이 간다고 하더니 혼자만 가우? 나도 데리고 같이 가요.”
하지만 이미 저승의 문턱에 한 발을 걸친 아버님은 아무 반응이 없으셨다. 아버님이 임종하시기 직전에 어머니는 갑자기 “여보, 사랑해요. 정말 고마웠어요. 마음 편히 가시구려” 하는 게 아닌가! 순간 아버님의 눈가에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고는 평온하게 숨을 거두셨다. 아버님은 생의 마지막 끈을 놓기 전에 어머니의 음성을 알아들으신 것이었다.
그 후 어머니의 상태도 빠르게 나빠졌다. 어머니는 걸핏하면 “아버지는 어디 갔수?” 하며 식구들을 놀라게 하셨다. “멀리 여행이라도 갔나?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언니! 별일 없겠지요?” 어머니는 급기야 며느리인 나를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치매는 어쩌면 극도의 슬픔을 지우는 지우개인지도 모르겠다.
아버님 근황을 물으시는 어머니가 애처로워 “보고 싶으셔요?” 하고 여쭈면 “꼭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하며 살짝 마음을 감추셨다.
“참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는데.”
아련한 눈길에 그리움이 절절했다.
아침에 목욕을 시켜드리고 어머니의 얼굴에 로션을 발라드렸더니 싱긋 웃으며 “어휴, 좋은 냄새! 언니, 나 시집 보내려우?” 하며 한껏 달뜨신다.
“멋진 할아버지 구해 드려요?” 짓궂은 내 말에 “싫어. 혹시 내 신랑이라면 모를까.”
“신랑이 누구예요?”
어머니는 얼른 아버님 함자를 대며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하신다.
귀여우신 우리 어머니! 수줍은 구십 노파의 눈동자에 생전의 아버님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