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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따라 깊어지는 사람의 향기

2020-06-16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충북문학기행
맑은 물따라 깊어지는 사람의 향기
'역동 우탁과 퇴계 이황'

    산이 높으니 골이 깊다.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물 따라 문학의 향기가 깊다. 고려시대 사람 우탁, 조선시대 이황이 이곳을 지나갔다. 그들은 보고 들은 풍경과 풍경 속 이야기를 시로 남겼다. 옛 사람이 남긴 작품은 옛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 살아난다. 이곳이 바로 단양이다.
 
(左) 사인암     (右) 사인암 부근 우탁 시비
 
우탁이 남긴 두 편의 시를 보다
    사인암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사람 우탁이 지냈던 벼슬인 ‘사인(고려시대 종4품 벼슬)’에서 유래했다. 단양이 고향인 그는 이곳을 좋아했다. 조선시대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재광이 그를 기리기 위해 푸른 물결 굽이도는 풍경에 우뚝 선 바위 절벽에 사인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인암 주변, 너럭바위 골 사이로 기운차게 흐르는 냇물 옆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 두 그루가 인상적이다. 그 소나무 뒤에 우탁의 시를 새긴 시비 두 개가 있다.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를 들고/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드니/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어 간데없다/적은 듯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저/귀 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사인암에 은거하는 우탁은 늙기가 서러웠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태조 때 우석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머니 삼년상을 치르며 아침저녁으로 직접 밥을 지어 어머니 산소에 올렸다고 한다. 그가 바로 우탁의 후손이었다. 우탁의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관통하여 숙종 임금 때도 거론된다. 숙종 임금은 우탁의 학업과 절의를 높이 사서 특명을 내려 우탁의 서원에 사액했다. 역동이라는 액호를 내린 것이다. 후대 사람들은 우탁 이란 이름 앞에 역동을 붙인다.  
    사인암 바위 절벽에는 많은 글과 이름이 새겨졌다.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는 사인암을 그렸고, 그 절벽에 이름을 남겼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사인암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했다.
    사인암 앞을 흐르는 물줄기 서쪽에는 단양천이 흐른다. 그곳 또한 빼어난 풍경으로 알려진 곳이니, 옛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사람들 사이에 퇴계 이황도 있었다.

 
이황의 친필로 새긴 글자라고 알려진 '탁오대 암각자'
 
퇴계의 친필이 새겨진 두 개의 바위
    옛 단양의 중심지였던 단성면 하방리 수몰이주기념관 건물 앞에 글자가 새겨진 바위와 비석들이 있다. 그 중 ‘복도별업 암각자’와 ‘탁오대 암각자’는 퇴계 이황의 친필로 새긴 글자라고 전해진다. 
    ‘복도별업 암각자’는 단양천 상류에 있었던 복도소(논밭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저수지) 근처 바위에 새겨진 글자다. 별업은 요즘으로 말하면 별장인 셈이다. 
    퇴계는 단양 군수 시절 복도소를 만들고 그 근처에 집을 짓고 때때로 경치를 즐기며 쉬었던 모양이다. 충주댐이 생기면서 복도소가 물에 잠기게 되자 바위에 새겨진 글자 부분만 잘라 현재 자리에 옮겨 놓았다. 
    ‘탁오대 암각자’는 단양천 상류 우화교 부근 바위에 새겨진 글자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었을 때 우화교 아래 계곡을 좋아했다고 한다. 
    ‘탁오(濯吾)’란 한자 그대로 풀어쓰면 ‘나를 씻는다’라는 뜻이고, 중국 시인 굴원의 <어부가>에 나오는 어떤 어부가 굴원에게 남긴 말, [창랑지수청혜(滄浪之水淸兮) 가이탁오영(可以濯吾纓)/창랑지수탁혜(滄浪之水濁兮) 가이탁오족(可以濯吾足)-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의 ‘탁오’는 아마도 사람이 세상에 들고남에 있어 자신을 알고 때를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닐까? ‘탁오대 암각자’도 충주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당시 우화교가 있었던 자리는 모르는데, 지금의 우화교 자리가 아닐까? 단양천은 단성면 남쪽, 대강면 방곡리 수리봉 부근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이다. 그곳에 단양 8경에 속한 계곡인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이 있고, 선암계곡을 지난 물줄기가 상방리에 있는 우화교를 지나 충주호로 흘러든다.
    퇴계는 단양군수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퇴계는 단양의 여덟 가지 경치에 대해 극찬했다. <단양산수기>라는 산문과 시도 남겼다. 그중 도담삼봉의 경치를 담은 시를 소개한다.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석양의 도담삼봉에는 저녁 노을 드리웠네/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별빛 달빛 아래 금빛 파도 너울지더라]

선암과 구담
    퇴계가 복도소를 만들고 우화교 아래 경치에 반해 스스로 마음을 씻었던 단양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선암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난다. 하선암의 너럭바위, 상선암의 물결바위는 선암 계곡의 상징이다.
    그 풍경을 글로 읊은 조선시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윤헌주다. 상선암과 하선암 사이에 있는 중선암 옥렴대 물 가운데 바위에 [四郡江山 三仙水石(사군강산 삼선수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단양, 영춘, 제천, 청풍을 일러 ‘사군’이라 했고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을 두고 ‘삼선’이라 한 것이다. ‘사군의 강산이 아름답고, 삼선의 수석이 빼어나다’는 뜻이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흐르는 선암계곡의 물줄기는 우화교를 지나 충주호로 접어든다. 충주호의 물줄기가 바로 남한강이니, 그 물줄기와 어울린 또 다른 절경이 구담봉과 옥순봉이다. 
    구담은 현재의 구담봉을 아우르는 그 주변 지역을 일컫는 옛 이름이다.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이나 그 후대 사람 이방운의 그림에 구담이 등장한다. 해발 300m가 넘는 바위 절벽 봉우리가 남한강 강바닥에서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오른 그림 속 풍경에서, 구담봉은 신선이 사는 마을을 지키는 거대한 파수꾼이 된다.(구담봉을 지나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퇴계를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이 작품에 담았던 도담삼봉이 나온다.)        
    구담에 대한 시를 쓴 사람이 또 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시대 사람 권섭이다. 권섭은 당쟁의 피바람을 피해 전국을 떠돌며 글을 지으며 사는 쪽을 택했다. 단양의 풍경을 읊은 시 구담, [구곡은 어드메오/일각이 그 뉘러니/조대단엽이/고금에 풍치로다/저기 저 별유동천이/천만세인가 하노라] 그의 시 구담을 새긴 시비가 단양읍 소금정공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