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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공간’으로 살펴보는 근대 병원

20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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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공간’으로 살펴보는 근대 병원
'현대식 의료의 출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제중원, 세브란스병원, 대한의원 등 병원 건축의 변화 과정을 통해 서양식 근대 병원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변화, 발전했는지를 압축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제중원 이전이 구료의료에 제한되어 있었다면, 재동 제중원과 구리개 제중원을 거치면서 연명의료와 전문의료의 단계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세브란스병원과 대한의원 등 유럽풍 병원 건축물의 등장은 최신식 의료설비를 갖춘 현대식 의료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左) 연세대학교 내에 복원된 제중원 모습(ⓒPublic domain)     (右) 국가등록문화재 제445호 알렌의 진단서(ⓒ문화재청)

    개항 이후 조선에서는 서양의학을 시술하는 장소로서 병원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서 자상을 입은 민영익이 알렌(Horace N. Allen)의 외과수술을 받고 극적으로 살아나면서 서양의학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1885년 알렌은 <병원건설안>을 제안하였고, 그 결과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제중원이 탄생하였다.
    재동에 위치한 홍영식의 가옥을 개조한 제중원은 행랑채에 전염병실, 바깥채에 대기실·진찰실·수술실·약국·안과병실·암실, 사랑채에 일반병실·예방접종실, 안채에 여성 병실, 별채에 독방 등을 두었으며 건물 중심부에 외래진찰실·수술실·외과병동·부인병동 등을 배치하였다. 또한 당시 유행하던 두창과 콜레라에 대응하기 위해서 예방접종실과 전염병실을 설치하기도 했다. 아울러 북쪽에는 의학교를 설치해 의학교육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제중원은 전형적인 전통 한옥 건물을 개조하여 40병상 규모의 서양식 종합병원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비록 서양식 건물은 아니었지만, 재동 제중원은 기존 동아시아 병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수술실, 전염병실, 예방접종실, 화학실험실, 의학교 등을 배치하여 근대 의료를 위한 새로운 공간 구성을 시도했다. 제중원은 이처럼 서양 병원의 공간구조를 한국 사회에 내면화하는 출발점이었다.
    외래진료와 입원환자가 증가하면서 재동 제중원의 수용 공간은 한계에 직면했다. 1887년 초 제중원은 조선의 대표적인 대민의료기관인 혜민서가 있던 구리개(현 을지로) 일대로 자리를 옮겼다. 구리개 제중원은 질병에 따라 구분된 병동, 수술실, 대기실, 진료실 등의 진료공간과 교회 창고, 부엌, 세탁소 등의 부속 건물을 갖추고 있었다.
    구리개 제중원 역시 여전히 전통 한옥을 개조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병동은 크게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침대를 사용할 수 있었고 현미경을 통한 가래 검사로 결핵을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구리개 제중원은 콜레라나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에도 적극 대처하면서 세균학 시대를 열어갔다.

 
(左) 국가등록문화재 제448호 에비슨의 수술장면 유리건판 필름(ⓒ문화재청)     (右)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전경(1930년대) (ⓒ동은의학박물관)
 
현대 병원의 기원, 세브란스병원
    1904년 세브란스병원의 개원은 병원 공간과 전염병 관리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 근대건축 도입기의 건물이 대부분 일본식의 의양풍 건물인데 비해 세브란스병원은 르네상스풍의 구미식 건축물로 근대 한국의 서양식 건축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제중원 원장인 에비슨(Oliver R. Avison) 박사가 1900년 뉴욕 만국선교대회에서 클리블랜드 의 석유 부호인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에게서 기부금을 받아 설립한 병원이었다.
    세브란스병원은 반지하와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40병상 규모였으며, 6개의 격리병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지하층에는 무료 진료실, 2개의 대기실, 상담실, 검사실, 약국, 의약품 창고, 난방로, 석탄창고, 주방, 세탁소 등이 있었다. 1층에는 진료실, 엑스레이 기계설비, 증기탕, 관절 치료 장치, 이비인후과 치료를 위한 압축공기 장치, 전기설비실, 주방 등이 있었고 남녀 화장실과 목욕실 등이 배치되었다. 2층에는 대수술실과 소수술실, 7개의 병실, 목욕탕, 화장실, 간호사실 등이 갖추어졌다.
    전체 건물은 온수로 난방이 이루어졌고, 전기 조명이 설치되었다. 검사실에는 현미경, 원심분리기, 항온기 등이 설치되어 혈액, 소변, 대변, 가래침 등을 검사할 수 있었으며, 엑스레이 장비와 실험실을 구축하여 최신 의학의 시연이 가능했다. 1905년 봄에는 격리병동이 별도로 개설되었고 영안실, 기숙사, 의학교 등이 추가로 배치되면서 진료, 교육,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었다. 세브란스병원은 현대병원의 기원으로서 세균실과 실험의학의 이상이 공간적으로 체현된 결정판이었다.

 
사적 제248호 서울 대한의원
 
사적 제248호 서울 대한의원
    1905년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의료 부문 현안으로 궁내부(왕실업무 총괄) 소속 적십자병원, 내부(내무행정 담당) 소속 광제원, 학부(교육행정 담당) 소속 의학교 부속병원 등을 하나로 통합하라고 지시하였고, 그 스스로 이 병원을 ‘대한의원(大韓醫院)’으로 명명하였다. 1906년 7월 이토는 육군 군의총감인 사토 스스무를 위원장으로 두고 일본인 7인으로 구성된 대한의원 창립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1907년 12월 사토는 대한의원 원장에 취임하였고 1908년 10월 대한의원이 정식으로 개원했다.
    이후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었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고 조선총독부의원장이 교장을 겸직하게 됨에 따라 조선총독부의원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부속병원처럼 사용되었다. 1926년 경성제대 의학부가 설립되자 조선총독부의원은 그 부속병원으로 사용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의대 부속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서울 대한의원은 사적 제248호로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근대 병원 건축물이다. 대한의원은 부지 3만 평에 병원과 의학교 기능이 복합된 본관, 7개의 병동과 부속시설 등 당시 한반도 건축 공사비의 10% 이상이 소요될 정도의 초대형 건축사업이었다. 대한의원은 도쿄의학교 본관을 모델로 삼았으나, 목조가 아닌 벽돌조를 택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는 없는 시계탑 건물을 건축함으로써 일본을 능가하는 새로운 건축을 보여 주었다. 이는 식민지 근대화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한편 대한의원은 병원 건축 양식이 아닌 학교 건축 양식을 채택하면서, 의료시설로는 맞지 않는 특징을 갖게 됐다. 중복도의 일자형 평면구조로 만들어진 탓에 남쪽은 자연채광이 충분한 반면에 북쪽은 채광이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수술실, 진료실, 실험실 등을 남쪽에 배치하고, 자연채광을 최대화해 열악한 전기조명 시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부인과 진료실은 우선순위에 밀려 후면에 배치되었는데, 자연 빛을 최대한 얻기 위해 후면의 동쪽 끝에 배치하였다. 1층에는 병원시설, 2층에는 의학교 시설을 배치했는데 자연채광을 최대한 돕기 위해 1층을 더 높게 설계했다. 또한 환기, 급수, 전기시설을 구축하여 최신의 의료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도 신경을 썼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급 의료시설은 일본인과 한국인 고위관료에게 우선 제공되었다. 이는 대한의원의 고급 의료의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한편, 한국인에게 마치 시혜라도 베푸는 양 전시하는 효과가 있었다. 결국 이를 통해 일본의 선진성, 식민 지배의 정당성 등을 선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