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근대와 현대, 남과 북 그림 속에서 그 차이를 보다

2020-10-15

문화 문화놀이터

문화재사랑

문화재 함께 읽기
근대와 현대, 남과 북 그림 속에서 그 차이를 보다
'‘승무도’로 보는 북한의 미술품 문화재 관리'

    김용준의 <춤>은 구성이 아주 단순하다. 여승의 춤사위와 그것이 음악의 선율에 따라 움직이는 것임을 암시하는 북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작품에 관한 문제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근대와 현대, 수묵과 채색, 남한과 북한 미술의 차이와 경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957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조선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았지만, 북한의 미술품 복원과 복제, 그리고 진위감정 등 문화재 관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문제작이다.
 
(左) 김은호, <미인승무도>, 1922, 비단에 채색, 199.4x85.1cm 플로리다대학 새뮤얼 미술관
(右) 장우성, <승무도(僧舞圖)>, 1937, 비단에 채색, 198x161cm 국립현대미술관
 
한반도 화가들이 사랑했던, 승무
    화가 김용준. 그의 작품 <춤>은 조지훈의 시 「승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옆으로 내딛는 발 걸음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장삼자락 사이로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있는 여승의 자태가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월북 화가인 그의 그림은 왜 승무가 예술성 높은 민속무용으로 평가받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김용준 이전에도 승무를 즐겨 다룬 작가가 있다. 먼저 대한제국 마지막 어진화가로 불리는 이당(以堂) 김은호를 들 수 있다. 김은호는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미약했던 미인화 장르를 새롭게 구축한 작가다. 1922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열린 ‘제1회 조선 미술전람회’ 동양화 부문에서 4등상을 수상한 김은호의 <미인승무도>에는 나무 아래에서 젊은 여승 두 명이 마주 보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그려 있다. 동양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하미인도(樹下美人圖)의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치마에 보이는 섬세한 문양 등은 근대기에 새롭게 나타나는 요소이다. 이는 일본화풍의 영향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은호의 채색인물화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졌는데 월전(月田) 장우성이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승무도>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스승인 김은호처럼 세필 채색화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승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느라 진땀을 빼다’가 ‘승무를 출 줄 아는 기녀’를 모델로 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김은호가 새롭게 시작하는 전람회 시대를 맞아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보여주기 위해 배경에 누각과 나무, 화초 등 다양한 요소를 집어넣은 것과 달리 장우성의 <승무도>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양팔을 뻗어 승무를 추고 있는 여승의 춤사위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의 그림은 몰아의 경지에 이른 듯한 얼굴 표정과 다음 춤사위로 넘어가려는 순간의 동작이 긴장감마저 느끼게 한다.
    비단에 채색으로 그린 이들과 달리, 종이에 수묵으로 그린 김용준의 <춤>은 간결한 구성과 선묘로 이루어진 인물의 동세에서 조선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흰 장삼 자락을 공간으로 뿌리는 춤사위의 유려한 선과 한번의 붓질로 형상화한 배경의 악기에 서는 수묵의 깊은 맛과 격조가 느껴진다. 한편 투명하게 비치는 장삼과 치마의 섬세한 문양은 사실주의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은호와 김용준의 작품이 35년의 간격을 두고, 다른 공간에서 제작되었음에도 작품의 크기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둘 다 공모전을 의식한 결과다.
    김용준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나와 1930년대 후반 『문장(文章)』지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무렵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필(轉筆)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채색화를 일본화풍으로 비판했던 그는 1950년 월북한 이후 평양미술대학 교수, 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연구원,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을 역임하며 조선화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左) 김용준, <춤>, 1957년, 190x86cm, 종이에 수묵채색,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동양미술관
(右) 김용준, <춤>, 1958년 재제작, 종이에 수묵채색,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북한의 미술, 작품의 유일성에 대한 생각 달라
    북한의 모든 미술은 조선화로부터 출발해 조선화로 귀의된다고 할 정도로 조선화는 북한 미술을 대표하는 장르이다. 김용준은 1955년부터 동양화나 모필화 대신 조선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의견을 개진했고, 조선화의 역사를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정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춤>을 통해 조선화의 양식적 특징을 직접 구현했다. 즉 조선화가 나아갈 방향을 작품을 통해 제시했던 것이다.
    <춤>은 1959년 동독·헝가리·북경에서 열린 해외 순회전시에서 “극히 시적인 형상이 마음을 끄는 민족적 형식의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렇게 1950년대 후반 북한에서는 조선화가 민족적 형식을 지닌 예술로 부상했다. 같은 시기, 남한의 화단은 전후(戰後) 대학을 졸업한 세대를 중심으로 앵포르멜*이 떠오르며 추상화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 남북 모두 현대미술로 진입하던 시점에 ‘사실’과 ‘추상’ 정반대의 방향으로 갔다는 점이 흥미롭다.
    * 부정형 또는 비정형을 뜻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정형화되고 아카데미즘화한 회화에 반발해 일어난 주관적 표현 경향을 말한다.
    그런데 김용준의 <춤>은 한 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一九七년 六월 단오절 지난 뒤 사흔 날 미산초당에서 그리다”라는 제발이 들어있는 작품 한 점이 현재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똑같은 그림이 또 한 점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미술박물관 소장의 <춤>에는 “一九七년 六월 단오절 지난 뒤 사흔 날 미산초당에서 그리다 / 一九八·二월 하순 원작 「작품 제二」에 의하여 모사함”이라고 쓰여 있어 자기 작품을 모사하고     ‘작품 제二’, ‘제三’ 번호를 붙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점 외에도 1960년 3월에 모사했다는 제발이 들어 있는 작품이 『조선미술』(1962년 8월호)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에서는 ‘모사’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남한에서는 복수성이 인정되는 판화 같은 특별한 장르나 학습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사를 제외하고 모사품을 전시장에 거는 일은 없다. 유일성, 원본성을 중시하는 미술시장에서는 이러한 모사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북한은 비교적 수정이 용이한 유화의 경우 이러한 모사나 개작이 더 흔하게 일어났다. 이렇게 모사품이 전시장에 걸릴 수 있게 된 데에는 북한의 ‘문화유물보호법’과 박물관의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유물관리수칙」 제24에는 “국보, 준국보 문화유물은 모두 모조품을 만들어 두며 수시로 진열실 전시품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법령은 고구려 고분벽화처럼 전시장에 전시할 수 없는 유물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 모사도를 만들면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분단된 지 70년. 그 세월만큼 남과 북은 작품 관리와 제작 기법, 유통, 용어 등에서 서로 달라졌다. 이러한 문제들을 남과 북 전문가들이 만나 함께 이야기 나눌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