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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

2020-10-21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재봉틀
'글. 박소현'

    “파자마 보냈다. 여름 거 벗고 이걸로 갈아입어라.”
    택배 아저씨가 전해 준 상자 속에는 겨울용 천으로 만든 하늘색 파자마 네 벌이 보자기에 곱게 싸여 있었다. 옷장 속에는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파자마가 몇 개나 더 있는데도  계절이 바뀔 때면 어머니는 또 손수 만든 잠옷을 식구 수대로 보내 주신다. 자신의 몸도 제대로 운신 못하는 아흔세 살 어머니는 이것을 만드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구입한 지 50년도 더 지난 낡은 재봉틀을 부여안고 몇날 며칠 힘겹게 바느질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부품조차 구하기 힘든 어머니의 분신 같은 재봉틀. 그 재봉틀을 보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어머니의 생애가 아릿하게 되살아난다. 
    어머니 마흔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슬픔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어머니는 생선 행상을 나서야 했다. 12살, 9살이었던 나와 여동생에게 최소한의 교육은 시켜야 한다는 절박감이 어머니를 거리로 내몰았으리라. ‘차마’ 중학교를 안 보낼 순 없어서…. 중학교를 마치고 나니 또 고등학교까지는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만 했다. ‘차마’라는 그 안타까운 말이 어머니에겐 멍에가 된 것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이 마을 저 마을로 생선을 팔러 다닐 수밖에 없었던 인고의 세월을 견디면서도 행여나 딸들이 기 죽을 새라 손수 예쁜 옷을 만들어 입혔고 거친 보리밥도 먹이지 않았다. 
    벼랑 끝에 위태위태하게 제 몸을 버티고 선 나무처럼 어머니는 지난한 삶을 살아내느라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섬처럼 한없이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동생이 부산에 있는 대학을 가게 되면서 어머니는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다. 우리가 살던 정든 옛집을 팔고서였다. 
    고향을 떠나 올 때 어머니는 재봉틀을 신주처럼 모시고 왔다. 40여 년 전 일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외항선을 타게 된 큰오빠 덕분에 그즈음 어머니의 고생도 끝이 났다. 몇 년 후 우리는 버턴만 누르면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지는 맨션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집으로 이사를 갈 때도 어머니는 그 낡은 재봉틀을 버리지 못했다. 자투리 천을 모아 밥상보를 만들거나 시골에 살 때 직접 짜 두었던 삼베로 홑이불을 만들기도 했다.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어머니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는 재봉틀. 오래된 동지처럼 재봉틀은 그렇게 어머니와 평생을 함께 늙어가고 있다.
    어둠을 밝히는 것이 어디 불빛뿐이랴. 어머니는 우리의 앞날을 밝혀주던 등불이었다. 이른 새벽이면 부뚜막에 청수 한 사발을 떠 올리고는 매일같이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던 어머니.
    우리 자슥들, 우쩌던지 아푸지 말고 공부 잘하게 해 주시다.” 
    하늘에 있는 신과 은밀하게 내통이라도 하듯 어머니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 만큼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도는 절박했고 또 처연했다. 그 속수무책의 현실 앞에서 어머니가 기댈 것은 어쩜 기도밖에 없었는지도 몰랐다. 
    늦잠 자면 안 된다며 새벽 같이 잠을 깨우던 무학(無學)의 우리 어머니. 시험 기간이 되면 마치 당신이 학생이라도 된 양 안절부절못했다. 가끔은 잠 안 오는 약이라며 각성제인 ‘타이밍’을 사 와서는 우리가 밤새워 공부하길 바랐다. 각성제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걸 따지기보다 더 절실했던 건 장학금을 타서 학비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심사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애타는 마음도 모른 채 꾸벅꾸벅 졸다가 타이밍(timing)에 맞춘 것처럼 방바닥에 엎어져 잠들기 일쑤였으니…. 
    자식들 뒷바라지로 젊음을 다 소진해버린 쇠락한 어머니가 무딘 손끝으로 재봉틀을 돌린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찔레~꽃 붉게~에 피~이는 남쪽나라 내 고~향∼” 하고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기도 하면서…. 어머니가 재봉틀로 파자마를 만드는 일은 생을 지탱하는 이유이자 삶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조카들이나 지인들이 인사차 왔다가 용돈이라도 조금 주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미리 만들어 둔 파자마로 답례를 한다. 아마도 어머니를 아는 지인들 중에 우리 어머니 표 파자마를 입어보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재봉틀을 돌리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고단했던 지난날과 잃어버린 청춘의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남한테 공 것 바라지 말고, 항상 내가 좀 손해 본 듯 살면 탈 없는 기라!” 
    젊은 시절, 그 힘들었던 풍랑의 세월을 의연하게 견뎌 온 어머니는 아무리 어려워도 남에게 의탁해선 안 된다는 걸 몸소 보여 주고 있다. 오죽하면 자식들에게 조차 행여 부담이 될까봐 스스로 수의를 장만하고 장례보험까지 다 들어놓으셨을까.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 했던가. 연어가 회귀하듯, 어머니는 고향 이야기를 하며 지난날을 그리워한다. 당신이 불공을 드리러 다녔던 남해 금산 보리암을, 정월 대보름 날 밤, 박 바가지에 촛불을 켜서 쌀과 동전을 넣어 바다 저 멀리로 띄워 보내며 자식들의 안녕을 염원했던 마을 앞 선창가를, 추석날 마을에서 열린 콩쿨대회에서 언니가 1등 상품으로 받은 양철 양동이를 들고 온 식구가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걸어오던 그 밤길을…. 
    어머니에게 남아있는 삶의 시간은 얼마쯤일까. 보자기에 싸인 파자마들을 보며 인생의 긴 강을 건너 온 어머니가 몇 해나 더 이것들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다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