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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거진천에서 만난 정철과 조명희

2020-11-23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진천 문학기행
생거진천에서 만난 정철과 조명희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태두 정철과 일제강점기 망명시인 조명희'

    공활한 가을 하늘을 품고 떠난 진천군 문학기행에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태두 정철과 일제강점기 망명시인 조명희를 만났다. 정철의 작품에서 가을 하늘의 풍류를 읽고, 조명희에게서 높푸른 하늘의 고독을 보았다. 하늘의 풍류는 땅에서도 유효한데, 하늘의 고독은 이 땅에서 애련하다.
 
(左) 정송강사 경내 고목과 정철의 시비들     (右) 정철 사당 송강사
 
정송강사에서 만난 정철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인 정송강사. 4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 그 하나만으로도 정철을 만나는 것 같았다. 정철의 묘를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게 1665년이었으니 말이다. 정철의 손자 양과 송시열이 이장의 의례를 행하는 모습을 그 나무는 보았을 것이다. 나무 옆 잔디밭에 정철의 대표작을 새긴 비석이 두 개 있다. 비석 앞면에는 관동별곡, 뒷면에는 사미인곡과 장진주사가 새겨졌다. 다른 비석에는 ‘아버님 날 나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로 시작하는 훈민가가 적혀 있다. 
    문학비를 뒤로하고 사당으로 가는 길, 홍살문 옆 신도비 앞에 잠시 멈춰 작가로서의 그의 생을 떠올려본다.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한 그였다. 이후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휴가를 얻어 독서당에서 공부하던 제도)에서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강원도, 전라도,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관동별곡과 훈민가 등을 지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찾은 곳은 고향 진천이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가사를 지은 것도 이때였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그의 시호가 문청(文淸)인 것도 그가 남긴 뛰어난 작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철 사당 송강사에 있는 정철 초상화
 
정철 묘 앞에서 장진주사를 읊다
    유물전시관에 있는 세 개의 전시품(복제품)이 눈길을 끈다. 명나라 신종이 조선의 선조임금에게 준 것을 정철에게 하사했다는 벼루(용연), 선조 임금이 하사한 옥배(옥으로 만든 잔)와 정철에게 절주하라는 뜻으로 하사한 은배(은으로 만든 잔)다. 호탕한 성격과 술을 좋아했던 성품이 가깝게 느껴진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그의 자상함을 엿볼 수 있는 글귀도 읽었다. [적두점 산약 연자말 범박 진예 등의 약을 물을 많이 부어 끓여 한 종자 가량 만들어 꿀을 넣어 잘 먹도록 해라. 모든 소식은 계속 빨리 알리는 게 좋겠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 중 누군가가 아팠던 모양이다. 그가 병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약재 종류와 약을 달이고 먹는 법까지 꼼꼼하게 적는 그의 마음을 엿보았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당에서 정철의 초상화를 보고 뒤돌아서서 산하를 바라본다. 발길은 그가 묻힌 묘로 이어졌다.
    짧지만 가파른 오르막 산길을 올라서서 그의 묘 앞에 섰다. 묘는 아래 위 두 기인데, 위에 있는 묘가 정철과 그의 부인의 합장묘다. 아래 것은 그의 둘째 아들 묘다. 바람 부는 묘 앞에서 땀을 식힌다. 그의 시 <장진주사>가 떠올라 되새겨보았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꽃잎 하나에 한 잔 술, 그렇게 끝없이 술잔을 나누세 그려/죽은 이 몸이 지게 위에 얹혀 거적에 덮여 가나/꽃상여 만장에 많은 사람의 애도를 받으며 가나/…/해 뜨고, 달 뜨고, 가는 비 오는 날, 함박눈 내리는 날, 바람이라도 불 때면 누구라서 술 한 잔 권할 텐가/…] -<장진주사>의 일부 구절을 빼고 의역함

 
조명희 문학관
 
조명희 문학관
    정송강사를 뒤로하고 작가 조명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조명희 문학관을 먼저 들렀다. 1894년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태어나 1938년 머나 먼 이국, 당시 소련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총살됐다. 그는 시와 소설, 희곡, 평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문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희곡집으로 알려진 <김영일의 사>를 펴냈고, 시집 <봄 잔디밭 위에> 등을 발간했다. 그는 이 시집의 서문에 ‘남의 시를 본뜨지 말고 우리 시를 찾아 지게목발 두드리는 나무꾼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자’라는 뜻을 남겼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설 회원이기도 하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한다. 그런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 망명시인. 망명 첫 해에 발표한 산문시 ‘짓밟힌 고려’는 이국에서 고달픈 삶을 살던 동포의 울분을 달래주었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원에 가입하고 1935년 하바로프스크 작가의 집에 거주했다. 1938년 KGB 하바로프스크 지하 감옥에서 간첩죄로 총살당했다. 이후 1956년 극동군관구 군법회의는 그를 무혐의 처리한 뒤 복권시켰다.  
    문학관에 전시된 미니어처에 눈길이 머문다. 그가 태어나고 살던 초가를 만든 것이다. 낮은 울타리 초가 옆 커다란 나무가 정겹다. 

조명희 생가 터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
    문학관을 나서서 그가 태어난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문학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24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 문학관 미니어처에서 보았던 조명희 생가 초가 옆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바로 이 느티나무였다. 그가 태어난 집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집 옆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의 생가 터를 지키고 있었다. 
    느티나무에서 길 건너편 대각선 맞은편에 ‘민족문학작가 포석 조명희가 태어난 곳’을 알리는 비석 하나가 도로 옆에 덩그러니 서있다. 
    비석에서 가까운 곳에 포석문학공원이 있다. 그의 시 <경이>를 새긴 시비 옆에 포석 조명희 문학제 10주년을 기념하면서 세운 비석에 조명희의 생애와 작품을 알리는 안내 글이 새겨졌다. 포석문학공원을 알리는 비석에는 그의 시 <봄 잔디밭 위에>의 한 구절 [내가 이 잔디밭 위에 뛰노닐 적에/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보아주실 수 없을까]가 새겨졌다. 고향과 봄과 어머니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읽는다. 
    조명희의 시 가운데 봄과 어머니에 대한 시가 몇 편 더 있다. 그의 시 <봄>을 소개한다.  
    [잔디밭에 어린 풀싹이/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남모르게 내놓아/가만히 웃더이다/저 크나 큰 봄을//작은 새의 고요한 울음이/가는 바람을 아로새기고/가지로 흘러 이 내 가슴에 스며들 때/하늘은 맑고요 아지랑이는 끝없고요] -조명희 시 <봄>을 오늘 말로 바꾸어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