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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가 빗어낸 세상

2021-02-23

문화 문화놀이터


청주문화생태계 DB
물레가 빗어낸 세상
'물처럼 자유로운 도예가 신기형'

    내비게이션은 멈추었는데 공방이 보이질 않는다. 둘러봐도 간판이 없다.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투박한 경상도 말씨에 살인 미소, 에스프레소 향을 닮은 남자가 반긴다. 신기형 작가다. 간판 없는 공방, 그럼에도 그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간판을 달지 않는 건, 지나가다 간판을 보고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간절해서 물어물어 찾아오는 수강생을 받기 위함이다. 올해는 수강생들이 코로나19로 인하여 요일제로 나누어서 공방에 온다. 몇몇 사람들이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중학교 때 급우들에게 목도장 파주던 소년
    신기형 작가 고향은 경북 의성이다. 6학년 때 전기가 들어온, 문명의 혜택을 모르는 골짜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삼촌들 모두 도장, 간판, 등 손재주가 뛰어났다. 그 디엔에이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신기형 작가 역시 손으로 하는 일은 즐거웠다. 옆집이 동장님 댁이었다. 5학년 때로 기억한다. 한 번은 동장님이 출생신고 등에 필요하다며 동네 사람들 명단을 주면서 목도장 좀 파 달라고 해서 모두 파 주었다. 중학생 때였다. 선생님께서 체력장에 찍을 도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도장 있는 친구가 몇 안 됐다. 그래서 친구들은 도장을 파 달라고 지우개나 나무를 가져왔다. 신기형 작가는 160여 명 되는 친구들 도장을 다 파 주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 그는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마냥 즐거웠다.


 
감성을 빚는 물레에 빠지다
    그에게 도예는 운명처럼 왔다. 영남이공대학 응용미술학과에 입학 후 물레를 돌리고 있는 한 선배의 진지함을 보게 됐다. 신비 그 자체였다. 그 신비함에 꽂혀 쫓아다니다 보니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호흡을 따라 손끝으로 흐르는 흙의 형체가 바뀌는 물레에 매료되었다. 이 무슨 마술인가. 꿈틀꿈틀 대지가 춤추듯, 거대한 들소처럼 그러나 부드러운 사막처럼 마음을 어루만지는 물레에 사로잡혔다.
    “물레의 역할은 완성된 작품의 10프로 정도입니다. 도자의 완성도를 지나치게 물레의 환상으로 보아선 곤란합니다. 도자는 긴 숙련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1300도의 불가마에서 장시간 구워낸 기다림의 극치요, 그 결과물입니다.”
    도예에서 물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도구일 뿐이다. 현대인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한다. 어쩌면 물레는 티브이를 바보상자라고 표현하듯, 자칫하면 도예가의 생각이나 사고를 짧게 하고 생각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면서 기계적 장점이 단점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에겐 예술보다 빵이 먼저였다
    199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대구에서 개인 공방을 5년 정도 운영했다. 그 후 97년도에 청주대학 공예과로 편입 후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낯선 타향으로 처자식을 거느리고 올라왔다. 배가 고팠다. 갖은 고생하며 공부하다 어느 날 보니, 건사해야 할 아내와 자식이 보였다. 처자식을 굶기면서 무슨 작품을 하겠나. 민속주 술병 만드는 사업을 했다. 그런데 금융위기가 왔다. 언젠가는 한 번 풀리겠지 하며 뼈아픈 고생을 했으나 5년 만에 빚더미에 앉으며 접었다. 세간살이에 붉은 딱지가 붙는 위기를 맞았다. 나는 좋아서 이 일을 하지만, 처자식에게 이건 아니지 싶었다. 마음에 의지할 곳을 찾으려고 아내를 따라 성당에 갔다. 종교 생활을 통해 마음의 여유를 찾고 욕심을 버릴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청주시 한국공예관’에서 강사 제의가 왔다. 공예관 시작 단계일 때였다. 취직하여 강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기업체에 상품을 납품했다. 이를 시작으로 여기저기 단체에서도 주문들이 계속 들어왔다. 마음을 비우니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하나 둘 모여든 수강생들이 100여명이 훌쩍 넘어 공예관을 꽉 매웠다. 새벽에 들어와 잠깐 눈 붙이고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수강생들을 지도하며 작품 제작에도 매진했다. ‘충북미술대전’ 대상 1회, 우수상 1회, 특선 등의 수상 경력을 늘여갔다. 전 세계 공예인들의 축제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공모전’ 에서 입상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한국공예관에서의 의미 있는 12년을 가슴에 안고, 꿈에 그리던 개인 공방을 열었다.


 
날지 못하는 비애, 생활자기 예술로 위로 받다
    개인 공방에 수강생들도 차츰차츰 모여들었다. 자신이 처음 도자기를 배울 때 너무 어렵게 배웠기에 수강생들에게는 최대한 즐기며 배울 수 있도록 노력했다. 처음 도자기를 시작할 때는 스승 앞에서 기침도 크게 못 하고, 눈칫밥 먹으며 배워야 했었다. 그 시절이 너무 힘들었기에, 배우고자 하는 열의만 있다면 정성껏 가르쳐 주었다.
    수강생들은 거리를 두고 보여주는 것만이 아닌, 누구나 쉽게 접하여 내가 직접 만든 찻잔으로 차를 마실 수 있는 생활예술 문화를 사랑해 주었다. 생활 자기로 시작한 수강생들은 자신만의 작품 활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수강생들은 공모전에 나가 여러 차례 수상했다. 대상도 타고 국전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그 뿌듯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예술은 배고픔에 가까운 직업이라 하지만 이제는 생활 속에서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친근한 존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분주한 강의를 접으면 개인 작품만 빚을 계획입니다. 남과 비슷한 전시가 아닌, 주제와 테마가 있는 특별한 전시를 해보고 싶습니다. 가령 물 위에서 한다든지, 수레에 누워서 천장을 보고 감상하는 작품을 한다든지 남이 안 한 것들을 해볼 생각입니다.”
    신기형 작가 작품은 청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 큰 작품들이다.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 앞 광장에 7m 높이의 5정의 솟대를 제작하여 세웠다. 지웰시티 공원에 솟대 5정, 강서1동 주민센터에도 솟대 3정이 있는데 그의 작품이다. 명암타워, 솔밭공원, 등에 나무를 접목한 솟대 5정이 있고, 청주종합운동장에도 그의 솟대 작품이 7정 있다. 괴산군 한지 마을에 있는 솟대 3정도 그의 작품이다. 모충동 주민센터 도벽 제작 등, 작품을 직접 생활에 응용하는 작업도 했다.  앞으로는 조형물보다는 다양한 오브제 쪽으로 작품을 할 계획이다. 이례적인 전시회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