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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합일의 경지

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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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합일의 경지
'글. 최명임'

    튀는 놈, 나는 놈, 덜떨어진 놈에, 고독의 상징인양 동떨어져 섬이 된 놈도 많다. 지는 햇살에 투영되는 그들의 심상을 보노라니 언뜻 내가 보이고 사람들의 모습도 있다.
    밭 언저리 돌무더기이다. 두고 보아도 좋았는데 생각해 둔 것이 돌탑이다. 탑은 아무나 쌓는 줄 아느냐고 옆에서 허를 찌른다. 몇 날을 두고 돌을 더 모아들였는데 눈에 띄는 돌마다 욕심이 난다. 고사하고, 돌만 눈에 들어온다. 지천인 돌을 주워내고 과실나무와 관상수를 심을 양이었는데 목적을 두니 집착에 가깝다. 이웃 산과 밭에 있는 돌까지 욕심을 내었다. 
    돌탑은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돌탑뿐이겠는가. 기초공사가 부실하면 완성을 이루기가 어렵고 완성을 해도 필경 얼마 못 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돌탑이 무너지는 일이야 잠시 내 마음만 무너지겠지만, 인간사는 달라서 부실공사의 대가로 애먼 사람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기도 하지 않는가.  
    큰 돌부터 놓았다. 제멋에 겨워 타협을 모른다. 윗돌이 고만고만하면 아래서 트집을 잡고 아랫돌이 원만하면 위에서 까탈을 부린다. 굄돌로 균형을 잡고 틈새도 메웠다. 



    돌탑의 궁극 목표는 합일이다. 바닥에 뒹굴 때 다져진 돌과 돌밭 같은 인생을 걸어온 내가 하나가 되는 일이다. 오랜 수행 끝에 도달한 무아의 경지와 같다. 그러니 나는 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저 난해한 개성과 교만과 고독의 아성을 끌어안고 화합을 시도하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돌 하나 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데 어느 순간 마음은 간데없고 잡념이 돌을 올린다.     안성맞춤 할 굄돌을 찾느라 손이 바쁘고 얼굴에선 비지땀이 흐른다.
    굄돌은 아무 돌이나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마음 없이 놓아도 아니 된다. 아집을 다스리는 덕이 있어야 하고 보듬어 안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 굄돌은 대의를 위한 소아의 갸륵한 희생이다. 가붓하지만 속은 깊어 저를 드러내지 않는다. 저를 낮추고 있지만, 열등이 아닌 겸손이다.
    나는 돌탑을 볼 때 아상에 붙들린 큰 돌의 불안한 조화만 보았지 굄돌의 희생을 눈여겨본 적이 없다. 다시 만날 때는 가슴 뭉클하게 하는 굄돌의 그 겸허함부터 보아야겠다. 
    탑이 올라갈수록 내 오기가 무색하다. 쌓았다 허물고 또 쌓기를 몇 차례나 했다. 번뇌와 망상으로 우글거리는 나를 이끌고 합일로 가는 중량감에 휘청거린다. 하나가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들의 돌탑은 기술일까, 굄돌의 희생일까, 쌓는 이의 무심일까. 
    사나흘 지나서 마음을 다잡고 갔더니 간신히 올라가던 탑이 무너져 있었다. 애먼 산짐승과 바람 탓을 했지만, 오기와 아집으로 쌓은 탑이 오죽했을꼬. 널브러진 군상을 버려두고 돌아섰다.      
    역사의 흔적이 드러나는 석탑이나 석성은 대개 반듯한 돌로 정교하게 쌓았다. 애민하는 군왕의 서슬과 석수장이의 예리한 정과 백성들의 호국 갈망이 있었다. 마을 입구나 동네 한 귀퉁이에 있는 돌탑도 이유가 있다. 허하거나 넘치는 기운을 조화롭게 하고 액막이를 위한 방편으로 탑을 세웠다. 염원을 두고 쌓는 탑은 신앙이다. 나는 무슨 이유로 돌탑을 쌓으려는 것인가. 
    다시 돌을 잡았다. 해뜨기 전이라 바람이 시원하고 까치가 기분 좋게 짖는다. 한쪽에선 예초기가 으르릉거리다 뚝 끊어지기를 반복하더니 아예 멈춰버렸다. 공해도 사라졌다. 차분하게 돌의 객기를 다스리고 불협화음을 조율하니 탑이 올라간다. 파도에 담금질을 당한 적도 없고 비와 바람을 탄 일이 없이 고이 흙 속에 묻혔던 돌은 아집이 유난하다. 사방으로 돌려가며 타협을 해도 저를 고집한다. 오롯이 저는 그대로 있되 구순한 작은 것이 무게를 받쳐 든다. 



    얼마나 견뎌낼까. 바람 불고 비 오면 허물어질까 걱정이다. 실은 형체 없는 내가 무너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기를 수천 번, 그리 살았으니 무너진다 해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우리는 수없이 허물고 다시 쌓아 올리며 살아가지 않는가.  
    산등성이에 햇귀가 비친다. 막 세수한 얼굴로 둥실둥실 오른다. 벙긋벙긋 웃는다. 하늘 아비 등에 업고 땅 어미 등에 업혀 중천으로 나선다. 중천에 오르면 비로소 세상과의 합일에 이를 것이다.
    돌탑이 완성되었다. 제쳐 두었던 둥근 돌은 머릿돌로 삼았다. 사람은 원만하면 감싸 안는 너그러움이 큰데, 괴이쩍게도 돌탑을 쌓는데 둥근 돌은 접근하는 모든 것을 배척한다. 너그러움은커녕 오롯이 저만 드러나고 싶어 하는데 본데없는 교만이다. 탑의 궁극 목표가 합일일진대 둥글다고 배제한다면 의미가 없다. 머릿돌로 앉혀놓고 만인의 본보기가 되어준다면 그럴싸하지 않겠는가.  
    마지막 의식으로 묵직한 염원 하나 올렸다. 곁지기가 저만치서 엄지를 불쑥 내민다. 탑이 앉은 모습이 범종을 닮았단다. 나도 엄지를 쌍으로 올렸다. 큰 당목으로 칠 범종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사바를 아우르는 종소리를 감히 흉내나 낼 수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기껍다. 
    돌탑은 돌과 돌의 합일이다. 나와 돌의 합일이다. 나와 나의 합일이다. 잠시나마 내 안에서도 합일의 종소리가 길게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