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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로 그려내는 무한한 상상력

202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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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로 그려내는 무한한 상상력
'동양화가 손동현'

    2005년 데뷔한 손동현 작가는 동양화에 서구적인 대중문화 아이콘을 결합한 작업을 시작으로 동양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왔다. 지난해 중국 북송(北宋)의 화가 곽희(郭熙)의 <조춘도(早春圖>에서 영감을 받아 <이른 봄>을 선보인 그는 최근 그림의 재료를 주제로 한3부작 개인전 'Ink On Pager'를 마뮐했다. 한지 위에 퍼져 나가는 먹의 파열처럼 동양화를 소재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손동현작가를 만났다. 


일상 속 소재로 고정관념을 깨다
    손동현 작가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작품은 마이클 잭슨의 모습을 동양화로 표현한 〈Portrait of the King〉 연작이다. 데뷔 때부터 사망 전까지 마이클 잭슨이 발표한 싱글 앨범 사진을 근거 자료로 삼아 그의 일대기를 한지에 수묵 채색해 그렸다.
    그밖에도 배트맨을 그린 〈영웅배투만선생상(英雄裵套曼先生像)〉처럼 할리우드 영화 속 등장인물을 동양화로 그리는가 하면, 나이키, 스타벅스, 버거킹 등 해외 유명 브랜드와 상표를 전통 민화풍으로 해석한 〈문자도〉 시리즈를 보여주기도 했다. 대중적인 이미지를 동양화에 녹여낸 손동현 작가는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대중문화와 순수미술, 창작과 인용 등 늘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져다주었다.
    “전통적인 형식과 내용에 머물고 싶지 않았어요. 1980년대생인 저는 제 또래들처럼 어려서부터 슈퍼히어로가 등장 하는 만화책을 즐겨 읽었고, 마이클 잭슨의 팬이었거든요. 브랜드와 상표도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이죠. 대중문화의 이미지나 브랜드 로고 등이 동시대의 일상적인 소재라는 것에 착안해 전통적인 형식과 연결시켰어요.”
    이후 손동현 작가는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신선도(神仙圖)나 불교회화의 사천왕도(四天王圖)에서 영감받은 듯한 〈Master Correspondence〉에는 무협 판타지 소설 속에 등 장할 법한 이국적인 인물의 모습을 담았다. 인물화 다음은 산수화였다. 〈배틀스케이프〉 시리즈를 통해 자신만의 시선으로 산수를 표현해 냈던 그는 지난해 10폭짜리 대작 〈이른 봄〉을 선보였다. 11세기 중국 북송의 대화가 곽희의 〈조춘도〉를 본 그만의 느낌과 상상력을 표현해 낸 작품이다. 
 
이른 봄 전시 전경. 194X1300cm (10폭), 종이에 먹, 잉크, 아크릴릭 잉크
 
그림의 재료에 주목한 ‘Ink on Paper’
    “〈이른 봄〉 열 폭의 그림은 모두 〈조춘도〉 속 일부를 소재로 합니다. 작업할 때 수많은 시각 이미지를 참고하는데 〈조춘도〉의 경우 직접 제 눈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곽희가 자연을 바라보고 자기 방식으로 산수화를 그린 것처럼, 저 역시 제 시선으로 바라본 〈조춘도〉를 제 방식대로 그려냈어요.”
    손동현 작가는 “산수(山水)라는 틀은 있었지만, 먹과 잉크, 붓의 종류 등이 다양해 그것으로 재미있게 놀아보자는 생각이 강했다”라고 전했다. 산수화를 그리고 있다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작가의 말답게 〈이른 봄〉은 바라보는 이에 따라 추상화 혹은 그래픽 아트워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이른 봄〉을 작업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의 주제가 아닌 ‘재료’에 주목할 수 있었다. 2015년 개인전 ‘Ink on Paper’에서 종이와 먹만 사용한 수묵 작품 을 선보였던 손동현 작가는 2020년 먹과 다양한 잉크를 함께 사용한 작품을 주제로 한 개인전 ‘Ink on Paper Ⅱ’를 열었다. 전시회의 제목인 ‘Ink on Paper’는 재료 정보인 ‘지본수묵(紙本水墨)’을 영어로 표기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동양의 먹[墨]처럼 채색과 필기에 이용되는 잉크를 먹과 결합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말풍선, 캘리그래피, 그래 피티 등 그동안 활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식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또 다른 동양화의 변신을 보여주었다. 
 
2022년 열린 ‘Ink on Paper III’ 전시 전경. 종이에 먹을 사용한 회화와 화첩, 족자, 부채 등 다양한 작품을 설치했다.
 
닮고 싶은 동양화의 자유로움과 익살
    앞선 전시에서 먹과 잉크를 다뤘던 그는 최근 3부작 마지막 전시 ‘Ink on Paper Ⅲ’에서 종이(Paper)를 주제로 삼았다. 다양한 색의 잉크를 사용했던 이전 전시와 다르게 먹만 사용하고 인물을 배제하며, 붓도 쓰지 않았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3P06〉의 경우, 종이를 구겨서 산 모양을 만들고 여러 방향에서 분무기로 먹물을 분사했다.
    그 형태대로 말린 다음 종이에 물을 뿌린 뒤 화판에 당겨 붙여 완성했다. 입체적인 상태의 종이에 분사한 먹은 평면 위에서 봉우리와 골짜기가 되었고, 평면 상태에서 필선(筆線)에 가까운 분무와 스텐실 기법은 산세와 구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유아용 레고인 듀플로 판을 탁본해 입체감을 더했다. 
 
左) 〈3P06〉, 종이에 먹, 탁본 먹, 194×520cm(overall 212×520cm), 4 panels, 2021-2022
右) 손동현 작가는“그림을 그리며 한없이 자유로웠던 과거의 화가들처럼 자신의 생각을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종이를 주제로 한 만큼 화첩, 부채, 족자 등 종이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도 있었다. 손동현 작가는 전시회를 준비했던 모든 과정을 ‘놀았다’라고 표현했다.
    “사군자와 더불어 문인들이 즐겨 그린 수묵산수화는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을 세부적으로 표현하려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종이 위에서 퍼지는 먹의 농담과 번짐, 다채로운 먹색과 선을 자유롭게 그려냈습니다. 수묵산수화를 그리고 놀았던 선조들의 마음처럼 이번 전시를 준비했어요.” 같은 작가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매번 색다른 작품을 선보여 온 손동현 작가. 그러나 기존 동양화의 고정관념을 깸과 동시에 현대를 사는 대중에게도 무한한 상상력을 품게 하는 것은 한결같았다. 또 한 번 진화를 거듭할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어떤 목표나 꿈보다는 그저 제가 다음에 흥미를 가지는 소재로 새로운 작품을 보여드릴 것 같아요. 그 옛날, 그림을 그리며 한없이 자유로웠던 과거의 화가들처럼 저도 제가 가진 생각을 그저 자유롭게 나타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