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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겨울 금강 이야기

2019-12-17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충북 물·길을 찾아서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겨울 금강 이야기
'영동 양산팔경 둘레길'

    충북 영동군 양산면 송호리 송림, 늘 푸른 소나무가 더 빛나는 겨울이다. 금강은 화려했던 단풍, 가고 없는 가을을 품고 소리 없이 흐른다. 천 년 하고도 수 백 년 전 신라와 백제의 전장이었던 곳, 아득한 역사의 물줄기가 말없이 흐르는 강가를 걸었다. 있는 힘을 다해 단풍을 피워낸 나무들,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섰던 그날의 사람들, 그런 자연과 인간의 역사 위를 오늘은 그저 걸었다.
 
송호리 송림 한쪽에 <양산가>를 새긴 노래비
 
역사를 품고 흐르는 푸르른 강물
    백제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신라의 성이 삼십여 개, 신라의 김춘추는 딸과 사위를 잃고 비분강개 하고 있었다. 655년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당나라, 끊이지 않는 전쟁 속에 국제 정세는 합종연횡 그 자체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서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 공조를 맺는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고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당나라와의 전투에 몰리는 사이 신라는 백제와의 결전에 군사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김춘추는 빼앗긴 성을 되찾고 딸과 사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백제와의 결전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이에 김춘추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부여) 함락을 계획하고 그의 또 다른 사위 김흠운을 낭당대감으로 내세워 군사를 이끌게 했다. 김흠운이 이끄는 신라군은 국경을 넘어 백제 땅 양산 금강 가에 진을 쳤다. 사비로 가는 중요한 길목인 조천성을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조천성을 손에 넣은 뒤 금산을 거쳐 논산, 부여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백제는 이미 신라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양산 금강 가에 신라군이 군영을 친 것을 확인한 백제군은 그날 깊은 밤에 선제공격을 했다. 기습공격을 받은 신라군은 완패했고 김흠운은 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삼국사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655년 태종무열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분하게 여겨 이를 치고자 도모하였다.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대감으로 삼았다. (중략) 백제 땅에 도달하여 양산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고, 나가 조천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백제군이 밤을 타고 달려왔다. 동틀 무렵 보루를 기어올라 들어왔다. 화살이 소나기 같이 퍼부었다.] 김춘추는 또 한 명의 사위인 김흠운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 사람들은 김흠운의 죽음 앞에 애도의 시를 지어 바쳤다. 그게 바로 신라가요 <양산가>이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송호리 송림 한쪽에 <양산가>를 새긴 노래비가 있다.

 
(左) 강선대에서 본 풍경     (右) 여의정
 
송호리 송림에서 강선대까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양산팔경 금강둘레길은 송호리 송림에서 시작해서 봉곡교를 건너 강선대, 함벽정, 봉양정, 봉황대, 수두교, 금강 둔치길을 지나서 다시 송호리 송림으로 돌아오는 약 6.6㎞ 원점회귀형 길이다. 출발지점인 송호리 송림 밖에는 금강이 유장하게 흐른다. 그 옛날 치열했던 전장에 올해도 어김없이 화려한 가을은 왔다 가고, 잎새 떨군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겨울을 맞이한다.
    송림 밖 바위 위 정자가 눈에 띈다. 조선시대 사람 박응종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낙향하여 강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만취당이라 했다. 당시 박응종은 황해도 해송 종자를 가지고와서 이곳에 뿌렸다고 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소나무밭을 송전(松田)이라 불렀다. 소나무는 세월 따라 우거진 숲을 이루고, 사람이 지은 정자는 사라져갔다. 오랜 세월 지나 후손들은 지금의 모습으로 정자를 다시 짓고 여의정이라 했다. 
    정자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탑과 작은 부처상이 아무렇게나 서있다. 부처상 뒤로 강물이 비친다. 강가를 걷는 사람들의 발길을 따라 이리저리 걸었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 걷다가 1978년 영화 <소나기> 촬영장소를 알리는 표석을 보았다. 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채 말라가는 빨간 단풍잎 몇 개를 뒤로하고 봉곡교로 걷는다. 다리를 건너면서 보이는 풍경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강물 왼쪽은 송호리 송림이고 오른쪽은 강선대다. 강선대는 선녀 모녀가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 보다 강물에 비친 낙락장송과 절벽이 어우러진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내려와서 목욕을 하던 곳이라는 안내 글을 읽고 정자로 이어지는 구름다리로 접어든다. 바위 절벽과 그곳에서 자라난 기괴한 모습의 소나무가 강선대의 전설을 상징하고 있었다.

 
함벽정
 
숲길과 강길
    길은 강선대에서 숲으로 이어진다. 숲길에 지난 가을의 흔적이 가득하다. 오솔길에 떨어진 낙엽은 아직도 단풍 색을 머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단풍잎은 떨어지지 못하고 그대로 말라가고 있었다. 숲을 지나는 바람은 숲을 흔들고, 숲 밖 강물 위를 지나는 바람은 강물에 파문을 일으킨다. 길은 잠시 숲을 벗어난다. ‘양심가게’라는 글씨가 적힌 플래카드와 까만 천막이 바람에 나부낀다. 탁자에 놓인 바구니에 고구마가 담겼다. 한쪽에는 삶은 계란이 놓여 있다. 사람 없는 무인 가게다. 양심을 산다는 문구가 바람이 되어 마음을 울린다.
    아무도 살지 않는,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집을 지나며 어디에라도 남아 있을 것 같은 온기의 작은 흔적을 찾아보려는 마음에 자꾸만 뒤돌아본다. 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걷는다. 대숲 일렁이는 바람이 계속 뒤를 따라온다. 낙엽을 밟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는 오솔길, 그 끝에 이루어진 소실점에 기와지붕이 보인다. 길 옆 산비탈에 엉킨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강물이 비친다. 물결마다 부서지는 햇빛이 눈에 어른거린다. 다가갈수록 다가오는 숲속의 작은 기와집, 함벽정이다. 함벽정 마루에 앉아 옛 사람들이 바라보았을 그곳을 바라본다.   
    함벽정을 지나면 봉양정이 나온다. 금운 이명주가 함께 어울리던 열세 명의 친구들과 지은 정자다. 당시에 정자를 짓고 나니 새들이 아침볕(조양, 朝陽)에 와서 울었다고 하여 봉양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967년에 지은 것이다. 양산팔경 중 하나인 비봉산이 보이는 전망데크도 지난다. 전망데크 아래 흐르는 금강과 수수한 산세의 비봉산, 그리고 그 중간에 사람 사는 마을을 본다.
    숲을 벗어난 길은 강가로 이어지고, 봉황대에 올라 갈색으로 물든 산천을 한눈에 넣는다. 강물이 흘러가는 먼 곳에 출발했던 송호리 송림이 보이고, 강물 왼쪽 산비탈은 여기까지 걸어온 숲길이다. 수두교를 건너서 왼쪽으로 돌아 걷는다. 둔치 길로 걸어도 좋고 둑 위에 난 길로 걸어도 좋다. 그렇게 걸어서 출발한 송호리 송림으로 돌아가는 길, 강 건너편 산비탈에 자리 잡은 봉양정과 함벽정이 갈빛 물든 산허리에 옛사람처럼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