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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남한강이 키운 시심(詩心)

2020-01-28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충북문학기행
푸르른 남한강이 키운 시심(詩心)
'충주 권태응·신경림 시인'

    문학은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작가의 몸과 마음을 통해 증폭된 그것들은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이로써 문학은 완전한 생명력을 얻으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세월의 단층에 남은 작은 이야기 하나가 현재에 되살아나 나를 바꾸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거슬러 문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은 나를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 마련한 충북문학기행이 그렇게 쓰이길 바란다. 그 첫 번째로 충주에서 태어난 시인 권태응과 신경림의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섰다.
 
(左) 권태응 시인의 묘     (右) 탄금대에 있는 권태응 시비
 
<감자꽃>의 시인 권태응
    자연을 닮은 어린이들의 이야기로 그 마음에 희망을 심어줬던 시인 권태응(1918~1951)의 흔적을 찾아간다.  
    권태응 시인은 1918년 충주 칠금동에서 태어나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와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나왔다.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과에 입학했다. 항일운동에 나섰다가 일본경찰에 입건되어 1학년도 다니지 못하고 퇴학당했다. 그 후 재일유학생들을 모아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1939년 5월 내란음모 예비죄와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3년형을 언도 받고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됐다. 1940년 옥살이를 하면서 얻은 폐결핵 때문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인천 적십자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곳에서 부인을 만났다.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부인과 함께 1944년 고향 품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난 지 십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은 그에게 삶의 희망이 됐다. 그는 고향에서 야학을 열어서 못 배우고 핍박받던 사람들에게 한글과 연극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들려준 동시는 아이 마음처럼 꾸밈없고 순수했다. 그의 시비에 새겨진 <감자꽃>을 옮겨본다. [자주꽃 핀 건/자주 감자/파보나 마나/자주 감자//하얀꽃 핀 건/하얀 감자/파보나 마나/하얀 감자]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에 있는 권태응 시인의 시 <감자꽃>을 새긴 시비를 찾아간다. 탄금대 주차장에서 오른쪽 길로 걷는다. 충혼탑을 지나면 그의 시비가 보인다. 소나무 숲에 안긴 시비가 엄마 품에 안긴 아이 같다.
    시비는 1968년에 세워졌다. 원래 동판에 시를 새겼었는데 누군가 그 동판을 떼어가서 돌에 시를 새겨 지금의 모습이 됐다.
    충주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권태응 시인 백일장을 열었는데 한 학생이 시비에 적힌 <감자꽃> 시를 읽고 ‘정말로 보랏빛 감자꽃이 핀 곳에 보라색 감자가 열렸는지 집에 가서 감자를 캐봐야겠다’는 내용의 동시를 써서 상을 받기도 했다.
 
(左) 권태응 시인의 생가 터를 알리는 표석     (右) 탄금대 앞으로 흐르는 남한강
 
권태응 시인의 생가 터에서 무덤까지
    탄금대에서 나와 시인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어수선한 길에서 만난 마을 아주머니도 권태응 시인을 알고 있었다. 시인이 태어난 집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아주머니가 마을회관에 가면 아시는 분이 있을 거라며 따라오라고 한다.
    마을회관에서 권태응 시인의 집안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아저씨를 만났다. 마늘을 까던 아저씨가 직접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시며 손을 털고 일어난다. 
    아저씨 뒤를 따라 간 곳에 ‘동천 권태응 선생 생가 터’를 알리는 커다란 표석이 있었다.(표석은 충주시 옻갓길, 도로에서 보이는 곳에 있다.) 표석 뒤가 권태응 시인이 태어난 집이 있었던 곳이며 표석 앞은 밭이었다고 한다. 밭이었던 곳은 누군가 지금도 밭을 일구고 있지만 집이 있었던 곳은 빈터만 남았다.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강가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린 권태응의 마음에 금모래 반짝이던 강가의 풍경이 박혔을 것이다. 시골의 서정을 담은 그의 많은 작품의 뿌리가 닿아 있는 곳도 어린 시절 그를 품어주었던 강마을 풍경이었을 것이다. 
    칠지마을다기능회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능바우길 도로가에 권태응 시인의 시 <재밌는 집 이름>을 새긴 시비가 있다. [읍내서 시집오면 읍내댁/청주에서 시집오면 청주댁/서울서 시집오면 서울댁/집집마다 재밌게 붙는 이름//동네 중 제일로 가까운 건/한동네서 잔치 지낸 한말댁/동네 중 제일 먼 북간도댁/해방통에 못 살고 되왔지요]
    권태응 시인이 살던 집터가 <재밌는 집 이름> 시비가 있는 도로 안쪽 칠지2길 골목 한쪽에 있다. 이집에서 그는 교현초등학교를 다녔다. 교현초등학교에도 그의 시 <감자꽃>을 새긴 시비가 있다. 
    일본 형무소에서 걸린 폐결핵을 고치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광복 후 한국전쟁 때인 1951년 세상을 떠났다. 충주시 금릉동 파라다이스웨딩홀 뒤 주차장 뒤 낮은 언덕에(마을 사람들은 ‘팽고리산’이라고 부른다.) 그의 묘가 있다. 그의 묘에도 <감자꽃>을 새긴 그의 시비가 있다.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
    ‘나는 내가 자라면서 들은 우리 고장 사람들의 얘기, 노래, 그 밖의 가락 등을 시 속에 재생시킴으로써 그들의 삶이며 사상, 감정 등을 드러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1979년 출간한 신경림 시인의 시집 <새재> 뒤에 붙인, 시인이 쓴 글의 일부다.
 
신경림 시인이 태어난 마을 풍경

    시인이 태어난 동네는 충북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다. 지금도 마을 앞 들판에서 농사를 짓는, 해질녘 고향 생각이 나는 풍경이다. 그는 그곳에서 1930년대 중반에 태어나 1950년대 후반까지 살았다. 그곳에서 자란 그가 향토색 짙은 풍경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에 담아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태어난 집은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원래 초가였는데 여러 번 집을 고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집을 감싼 흙돌담이 골목을 따라 굽이도는 풍경이 정겹다. 대문 앞 커다란 나무 한 그루는 아마도 그곳에 살던 시인의 발자국소리를 기억할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마을 노은 초등학교에는 그의 시 <농무>를 새긴 시비가 있다. 시비 뒷면에 새긴 글에 따르면 <농무>의 배경 무대는 노은면이며 1960년대~1970년대 농촌의 모습이 담겼다. 
    그가 태어난 노은면 연하리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11㎞ 정도 떨어진 엄정면 목계리 남한강가에 그의 시 <목계장터>를 새긴 시비가 있다.  
    목계는 남한강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부터 강물을 오르내리는 하상교통이 발달한 포구였다. 소금, 해산물, 생활필수품 등을 배에 싣고 와서 물물교환 형태로 거래했다. 조선 후기에는 인구가 많아져서 거래 양도 그만큼 늘었다. 목계나루는 크게 발달했다. 충북, 경북, 강원 등을 잇는 육로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보부상들의 거래도 활발했었다. 
    1973년 목계대교가 놓이면서 나루는 사라졌다. 목계장터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지금은 장터의 흔적 대신 신경림 시인의 시 <목계장터>를 새긴 시비가 옛 장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시비에 새겨진 시의 한 구절,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에 시비 앞을 흐르는 ‘겨울강’의 풍경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