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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정성이 담긴 묘약, 흑초

2020-12-21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농식품 종합 정보매거진 <농식품 소비공감>

장인을 만나다
시간과 정성이 담긴 묘약, 흑초
'현경태 장인'

    자연 발효된 전통 식초를 두고 혹자는 “1만 년의 시간을 거친 묘약”이라고 일컫는다. 그만큼 맛과 영양이 풍부하기 때문. 특히 진한 갈색빛 흑초는 혈액순환과 혈압 개선, 항암 효과 등이 뛰어나다고 전해진다. 조부 때부터 3대에 걸쳐 흑초를 만드는 현경태 장인(대한민국 식품명인 제73호)을 만났다.


 
4대째를 바라보는 흑초 제조의 역사
    장인을 만나기 위해 제조장 안으로 들어서자 장식장과 바닥을 수놓은 ‘초두루미’가 눈에 띄었다. 초두루미는 허리춤이 볼록하고 목이 잘록하며 주둥이가 돌출된 항아리를 말한다. 두루미를 닮아 초두루미라 부르는데, 스스로 온도와 공기의 양을 조절해 질 좋은 천연 식초를 만들어내는 기특한 항아리다.
    “옛날엔 초두루미를 부뚜막에 두고 식초를 만들어 쓰는 집이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식초를 주로 마트에서 사다 쓰니 요즘 사람들은 이 초두루미를 잘 몰라요.” 현경태 장인의 설명이다.
    그의 말마따나 젊은 세대에게 식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묻는다면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다. 식초는 술이 과하게 발효되어 신맛이 난 것에서 유래했다. 식초를 뜻하는 영어 단어(vinegar)와 와인을 뜻하는 프랑스어(vin), 스페인어(vino) 등이 비슷한 철자를 사용하는 이유도 이 때문. 현경태 장인은 “술을 잘 빚는 집이 식초도 잘 만든다”라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 산업화 시기에 쌀 부족이 심화하면서 전통주와 전통 식초의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습니다. 유년 시절에는 집에 밀주 단속반이 자주 찾아왔는데, 어머니께서 술을 많이 빚었을 때는 술독에 마늘을 넣어 사과밭 울타리에 깊이 숨기곤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게 식초가 되어 향과 맛이 더 좋아진 걸 알게 되었어요. 이런 흑초 조리법은 벌써 3대째 내려오고 있고, 최근 아들이 4대 전수자로 선정됐습니다.”


 
뛰어난 감칠맛과 놀라운 기능성
    흑초는 현미식초를 3년 이상 숙성해 검은빛을 띠는 식초를 말한다. 미색의 현미식초가 어떻게 간장과 비슷한 진갈색을 띠게 되는지 그 원리가 궁금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미식초를 빚는 과정을 아는 것이 먼저다.
    “현미에는 벼의 영양소가 집약된 쌀눈(배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현미에 누룩을 섞어 술을 빚은 뒤 여기에 건강한 종초(씨초)를 넣고 약 30℃에서 산소가 잘 통하도록 보관하면 초산균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7~10일 뒤 술 표면에 거미줄처럼 얇은 초막이 생깁니다. 초막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사라지고 맑은 미색의 식초가 되는데, 초막이 더 보이지 않으면 식초가 완성됐다고 보고 숙성 과정을 거칩니다.”
    현미가 종초에 의해 발효되는 동안 단백질 등이 분해되면서 7종의 필수아미노산과 60종의 유기산이 생성된다. 이 과정에서 빛깔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 현미식초가 완성된 이후에도 3년 이상 숙성해야 비로소 연한 간장 향과 톡 쏘지 않는 은은한 신맛, 약간 씁쓰름한 맛이 매력적인 흑초가 만들어진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식초는 주정을 주원료로 만든 술에 산소와 초산균을 깊숙이 주입해 기계로 섞는 ‘심부발효법’으로 만든다. 그래서 1~2일이면 완성되고 강한 신맛이 나며, 전통 식초의 기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전통 식초는 곡물과 누룩으로 빚은 술에 종초를 주입해 초막을 생성시킨 뒤 천천히 발효하는 ‘표면발효법’으로, 발효와 숙성이 이루어지는 동안 몸에 이로운 아미노산, 유기산 등이 생성된다. 특히 유기산은 강력한 항산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 명나라 시대 의학서 <본초강목>에 의하면, 곡물 식초를 회충 감염 예방, 분만실 소독, 육류 보존 등에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004년 일본 가나자와 의대 연구팀은 흑초가 암세포 증식 억제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선택은 ‘흑초’
    식초의 효능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면서 몇몇 이들은 시중의 공장제 식초나 액상과당이 포함된 가공 식초를 건강식품 또는 다이어트 식품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몸에 좋은 식초란 곡물이나 과일을 활용한 천연 발효 식초임을 기억해야 한다.
    “공장제 시판 식초나 식초에 설탕, 액상과당 등을 넣은 가공 식초는 전통 식초 고유의 맛과 거리가 먼 데다, 가공 식초의 경우 과용하면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우려가 됩니다. 건강을 생각한다면 대량생산한 공장제 식초보다는 천연 발효 식초, 전통 식초를 먹어볼 것을 추천합니다.”
    현경태 장인은 후학 양성을 위해 ‘현경태의 식초 학교’를 운영하는 등 전통 식초 명인으로서 뜻깊은 행보도 이어오고 있다. 매년 서울 강남에 있는 전통주 갤러리 내 식품명인관에서 진행되는 식초 학교에서는 옛 문헌 속 흑초를 재현해보는 ‘흑초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전통 식초 홍보대사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는 그가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세계 최고의 식초를 만들고 싶습니다. 일본, 중국, 이탈리아 등 세계적으로 전통 식초를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국가들이 있는데 우리도 과실, 약재 등을 이용해 천연 물질로 면역력을 높일 수 있는 기능성 식초를 다수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세계적으로 이름난 전통 식초를 만들고 나아가 명품 식초 마을로 발돋움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TIP] 현경태 장인이 전하는 흑초 활용법
    흑초 원액에 기호에 따라 생수를 3~5배 희석해 음료처럼 마셔도 좋고, 올리브유와 흑초를 2:1 비율로 섞어 드레싱으로 즐겨도 좋다. 또 요구르트에 흑초를 약간 넣어 먹으면 새콤달콤 건강한 간식이 된다. 어떤 요리와도 궁합이 좋은 흑초는 나물, 탕, 국, 조림 등 각종 요리에 조금 첨가하면 더 깊고 풍부한 맛을 낼 수 있다. (글 이선 / 사진 장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