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병동엔 의료진만 있는 게 아니다. 영양사부터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 성직자까지 다양한 이들이 오간다. 그중 자원봉사자는 ‘호스피스의 꽃’이라 불린다. 말기 환자에게 다가가 마음을 열고 마지막 친구가 돼주기 때문이다. 노희원(77) 씨는 “호스피스·완화의료는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환자가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자신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면서 “그게 내가 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2012년부터 아주대병원 권역별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에서 봉사 중이다. 2011년 아주대병원이 호스피스 전문기관으로 지정된 직후부터 몸담았다. 햇수로 13년째. 봉사자들 사이에서 터줏대감으로 통한다.
10월 11일 ‘제12회 호스피스의 날 기념식’에서는 보건복지부 장관상도 받았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발전에 기여했다는 이유에서다. 수상 소감을 묻자 노 씨는 “‘이 나이에 머리 하얘서 상은 무슨 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아주대병원은 2019년 경기도 유일의 ‘권역별호스피스센터’로 지정됐다. 병상은 총 11개다. 서른 명의 자원봉사자가 번갈아 환자를 돌본다. 노 씨는 매주 목요일 오후를 맡고 있다. 그는 “목요일만 기다리며 산다”고 했다.
햇수로 13년째 아주대병원에서 말기 환자를 돌보는 노희원 씨. (사진 C영상미디어)
완화의료센터에서 말기 암 환자를 돌본다고 들었다. 말기 암 판정을 받고 20~27일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들이다. 기도도 해드리고 말동무도 된다. 머리 감기고 목욕 시키고 옷 갈아입히는 건 기본이다. 마사지 해드릴 땐 ‘대한민국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있으시라’고 한다. 27일을 채 못 채우는 환자도 왕왕 있다. 멀리 시골에서 버티다, 버티다 입원한 분들은 오자마자 ‘햇살방’으로 가기도 한다. 완화의료센터에서 숨이 끊어질 것 같을 때 가는 곳이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지켜봤겠다. 어느 날은 마사지를 하는데 환자 배가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머지않았구나 싶었는데 다음날 돌아가셨다. 배가 시멘트처럼 굳었는데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아주 고이 눈을 감았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환자도 있었다. 원체 과묵해서 말이 없던 분이었다. 열심히 마사지를 해주고 기도도 해드렸더니 마음을 열었는지 처음으로 입을 뗐다. 나이도 어린데 이리 신세를 져서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마사지를 받으면 병이 좀 나을까요?’하고 물어왔다.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시한부 환자에게 희망을 주지 말라고 교육받는다. ‘꼭 회복할 거다, 반드시 이겨낼 거다’라는 말은 금기어다. 대신 이렇게 답했다. 여기 계시는 동안 편안하시라고 해드리는 거라고. 그 말을 듣고 다음날 운명하셨다. 아주 평안한 표정이었다.
환자들이 다 고령자는 아닌가보다. 대학교 신입생도 있었다. 뇌종양 말기로 기억한다. 가망이 없어서 이곳에 왔다. 밤잠 설치며 옆에 있던 어머니께 다가가 ‘환자와 대화를 좀 해볼 수 있겠냐’고 했더니 ‘아이가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 종일 침대에 커튼을 쳐놓고 있었다. 결국 혼자 그 아픔을 끌어안고 1주일 만에 세상을 등졌다. 생각하면 지금도 짠하다.
여러 죽음을 목도하다보면 삶에서 부질없다 싶은 것이 있을 것 같다. 돈 좇아 아등바등 사는 거다. 아무리 부자라도 죽으면 소용없다. 단 1원도 만질 수 없다. 먹고살 만큼만 벌면 된다.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가족이다. 있을 때 잘해야 한다. 가고 나면 아무리 땅을 쳐도 돌아오지 않는다. 요즘은 보호자들이 병문안을 잘 안 온다. 입원할 때 잠깐 얼굴 비추고 마지막까지 찾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씁쓸한 현실이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뭔가? 10여 년 전 갑자기 몸이 아파 구급차에 실려 간 적이 있다. 아내가 옆에서 울면서 ‘하늘이 당신을 이렇게 데려가진 않을 거’라고 하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건강 잃으면 다 끝인데 안 아플 때 더 많이 돕고 나누며 살 걸 하는 후회였다. 회복하면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결심했고 퇴원 후 바로 호스피스자원봉사자 교육을 받으러 갔다.
봉사활동 전과 후 삶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욕심이 없어지고 부드러워졌다. 천년만년 사는 게 아니니 좋은 게 좋은 거다 싶다. 원래는 성격이 불 같았다. 아내는 내가 성질 한 번 부리면 아무 대꾸를 못했고 직장에서도 모진 상사로 이름났었다. 요즘은 나도 모르게 웃는 일이 많다. 자주 웃고 좋은 말을 하다보면 옆 사람도 기쁘고 내 삶도 윤택해진다.
가장 보람되는 순간은? 보호자들이 엄마, 혹은 아버지가 ‘평안하게 소천하셨다. 감사하다’고 말할 때다. 굳이 그런 말을 듣지 않더라도 환자의 편안한 얼굴을 볼 때 가장 보람된다. 가실 때도 그 모습이라면 더 바랄게 없다.
힘든 점은 없나? 1주일에 단 하루 봉사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힘들다고 여기면 나도 주변도 다 힘들어진다. 지난 6월 새로 들어온 봉사자 두 분에게도 ‘봉사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임무대로 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요즘은 예전만큼 자원봉사자가 없는 게 문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봉사요원들이 꽤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다. 특히 젊은 봉사자를 찾기 어려워졌다. 아파서 거동이 어려운 사람을 들어보면 생각보다 무겁다. 젊은 친구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인 이곳에서 환자를 들어보며 인생의 무게와 의미를 다시금 책정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존엄한 마지막을 위해 정부에 전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지금도 말기 환자를 위한 여러 정책들이 있다. 복지부 지원으로 이곳 완화의료센터 입원비 또한 환자의 부담은 적은 것으로 안다. 다만 이러한 호스피스 서비스의 혜택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능하다면 공기 좋고 새소리 들리는 지역을 적극 활용해서 머무는 동안 자연 속에서 치유받고 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봉사를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가자.’ 이 일을 시작하고 정한 인생 모토다. 아름답게 살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거다. 그만 둘 계획은 아직 없다. 문자 그대로 힘닿는 데까지 할 생각이다. 아직은 환자를 수발하는 데 무리가 없다. 팔 힘도 좋고 눈도 잘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