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근원 이영미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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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서예가는 어린 나이에 항생제 과용으로 청력을 잃었다. 글쓰기를 즐겨했던 그녀의 꿈은 국어교사였다. 하지만 청각장애인이었던 한 교사지망생이 교사임용 최종면접에서 실패하고 자살했다는 기사를 접한 그녀는 꿈을 접었다. 그리고 찾아온 좌절을 극복하게 만든 것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었다. 자신과 같은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최고의 화가로 우뚝 선 김기창 화백은 그대로 그녀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그 후, 20년 동안 모든 서체를 섭렵했다. 한글에 빠져든 이유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다. 500년 전, 세종대왕의 마음과 닮았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을 어려움을 겪으니 한글을 만들었다.’

그녀 또한 한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다르지 않았다.


“한문은 관람객들이 뜻을 알지 못한다. 그냥 그림처럼 형태만 본다. 하지만 한글은 내 나라 글이니 쉽게 소통된다. 의미도 이해할 수 있고 아름다운 글자의 형태도 즐긴다.”

그렇게 한글과 사랑에 빠졌다. 20년 동안 한글만 써왔다. 그녀의 한글서체는 표정이 살아있다. 글자로 끝나지 않고 움직여 보는 이들에게 살갑게 말을 건다. 슬퍼하지 말라고, 용기를 내리고 위안을 준다.

“한글은‘아’라는 글씨에도 의미가 남다르다.‘o’는 자식처럼,‘ㅏ’는 부모처럼 포용하는 마음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국적불명의 글자들이 난무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얼마 전, 자식 같은 40년 서예작품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자연과 물상들은 만물의 합이 되었다, 다시 만물의 시작으로 돌아간다. 처음과 끝이 하나라는 것을 느낀다. 다시 시작이다.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내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만들 것이다”


그녀의 한글사랑은 다시 시작한다. 그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 시작되는 한글사랑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궁금하다.





서예는 상생하기 위한 공부다

■40년 서예의 삶을 살았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은지.

▷“사람마다 타고난 천진을 되찾아 행복한 느낌과 현재 그대로의 마음을 표현 하고 자연과 사랑을 주제로 할 것이다. 최근 20여 년간 한글에 집중했지만 그 전에 한문, 문인화, 서각, 전각을 두루 했던 만큼 한글과 다른 분야의 서예들이 사이좋게 조화와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게 하고 싶다. 어떤 특정분야만 좋고 어렵고 그런 것이 아닌 모두가 잘 어울려서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서 공감을 줄 수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은 미술대학의 교수에게 조형에 관한 지도를 받고 있고 학부에 다시 편입해서 들어가 공부한다. 사이버대학이긴 하지만 예술조형과 예술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다. 단순히 서예라는 것만 생각하기 보다는 좀 더 예술적이면서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찾고 싶다. 그것이 상생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영미 작가가 생각하는 서예는 무엇인가?

▷“붓을 잡아 하얀 종이위에 글씨를 쓰는 행위지만, 실제로 육신과 정신을 다잡아서 마음과 우주, 자연과 친화적인 삶을 가게 하는 내 삶의 지팡이였다. 신이 주신 선물이기도 하다. 서법을 익혀서 법고창신하고 온고지신하는 것도 결국은 자연 그대로를 본받는 것이다. 조화로운 삶과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을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19살부터 작품을 썼다. 그런데 얼마 전, 작품을 모두 소각했다.


▷“19살 때부터 작품을 했는데 사람들이 부탁하는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상당수의 작품…특히 대형작품들은 작가가 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는 공모대전에 출품한 작품들이 많다. 그동안 부산, 광주, 예산 추사고택, 서울, 동아미전 등 전국각지의 공모전을 짧게는 10년 길게는 25년에 걸쳐서 도전했다. 그래서 초대작가가 되고 심사위원이 됐다. 올해 마지막으로 국전이라는 한국미술협회의 대한민국미술대전에 특선하여 졸업하여 초대작가가 됐다. 생애 공모전은 올해가 마지막으로 출품을 한 것이다. 이번에 불태운 작품들은 주로 그러한 공모전에 출품한 세로 2미터 내외의 대형작품들이다. 불태우면서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 이런 작품들을 제작해서 드디어 작가가 되었지만 이 작품들이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작가가 되기 이전의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하다.”



여성인권운동은 구덩이를 메우는 작업

■선생님의 취미생활은 무엇인가?

▷“글쓰기다.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꾸준히 글을 써서 기사가 500개 가량 된다. 그것을 2권의 책으로 묶어서 내기도 했다. 그중에 1권은 제가 직접 편집을 하고 표지 캘리그라피도 했다. 청주 1인1책 만들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나의 취미중 하나는 음악 감상이다. 지금 사회복지사겸 에듀케이터로 가톨릭재단에서 일하는데 내가 기획하는 것도 음악악기교육프로그램이다.”

■서예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도 활동을 했다. 특히 여성인권에 관한 일을 많이 했다.


▷“여성인권에 대해서는 아무 준비도 계획도 없었다. 1998년에 첫 개인전을 했는데 그 즈음에 내가 한 해에 전국규모의 서예대회에 대상을 3개 받았다. 학원에도 문하생들이 많이 왔다. 그리고 바로 주성대 사회교육원에서 장애인들을 만났는데 주성대 사회교육원 서예반에 들어온 여성이자 장애인 중에 젊은 20~30대가 많았다. 그런데 그들이 한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작가활동을 잠시 멈추고 연구실롤 불러 초등학교 1, 2학년 교과서를 가지고 국어를 가르쳤다. 서예를 배우게 하기 위해선 우선 한글을 가르쳐야 했다. 그런데 내 서실에서 같이 숙식을 하며 생활하다보니 교육과 경제, 가족폭력 등의 문제와 고민도 공유하고 상담하고 하게 됐다. 그런 계기로 청주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와 다울교육문화센터를 설립하고 단체도 설립을 하게 됐다. 산길을 가다가 구덩이를 발견하고 그 구덩이를 피해가지 못하고 구덩이를 메우는 일을 한 거다. 그런데 그 구덩이를 메우면 또 다른 구덩이가 보인다. 끝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구덩이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구덩이가 위험한 것을 안 사람들이 늘어나 나보다 더 열심히 구덩이가 위험하다고 외치며 구덩이 메우는 일을 하는 것이 여성인권활동이 된 것이다. 지역사회의 다양한 여성들과 서울의 박노해 시인 등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서 함께 잘 설립할 수 있었다. 이제는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 다시 9년 만에 2번째 개인전을 개최하고 다시 작가활동을 열심히 하게 된 것이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여성인권에 관한 일을 하고 나니 잠도 잘 오고 작품도 전보다는 좀 더 사람들과 공감을 할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청각장애인 이영미 작가는 원광대대학원 서예문화학과를 수료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소장작품 선정 작가다. 충북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수상, CJB직지세계문자서예대전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대한민국 서예부분 초대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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