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역사를 상상(想像)하다 - 강태재의 ‘역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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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뜨거웠지만, 바람 덕분에 좋은 여름날이다. 상당공원 뒤쪽 주차장에 버스 한 대가 서있다. 사람들은 담을 넘어온 푸른 나무를 올려다본다. 아이들은 까치발을 떼고 담장 너머의 풍경이 궁금한지 바라보고 있다. 나뭇잎을 보는 건지, 나뭇잎 사이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의 발치에는 꽃들이 한 움큼 떨어져 있다. 잠시 기다리는 시간의 풍경도 엽서의 그림 같다. 많은 인원보다 생각보다 단출하니 어쩐지 호젓해 좋다. 역사여행으로는 그만이다.
첫 청주역사문화기행은 신라시대 ‘서원경성과 불교문화’다. 국립청주박물관을 거쳐 보살사 그리고 탑동 오층 석탑을 찍고 용화사에서 마무리하는 코스다. 버스 입구에서 부지런히 탐방객들을 맞이하는 이 사람, 강태재다. 은빛 머리칼이 잘 어울리는, 그리고 안경테가 넘어 눈빛이 유순한 노신사였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죠. 어쩌면 왕조 중심의 역사관을 민초 중심의 역사관으로 바라본다면 색다른 역사가 보이지 않을까요? 허구가 아닌 역사적 증거물을 통해 유쾌한 상상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차창가로 지나치는 도시의 풍경이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오늘은 막 달려가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역사 속으로 걸어가 볼 일이다.




국립청주박물관, 아이가 과거로 뛰어 가다

“선생님, 이거 무슨 부채예요?”
강태재 선생의 뒷주머니에 꽂힌 부채를 보고, 아이가 묻는다. 지난 세월의 흔적을 찾아 설명하고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강 선생이 아이는 신기했던가보다.
부채마저도 오래된 유물처럼 바라보고 있으니. 강선생은 선뜻 아이에게 부채를 건네준다. 부채에 새겨진 오래된 서체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비석에 반갑게 말을 거는 듯 친밀하다.
“이것은 운천동 신라사적비죠. 산직마을에서 공동 우물터에서 빨래 돌로 사용되던 것이었지요. 거기에는 불법(佛法)을 찬양하고, 왕의 덕과 전쟁의 참화가 끝나고 삼국이 통일된 것에 대해 칭송하고, 영토의 확장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내용이지요.”
아이들은 어른들이 귀 기울여 듣는 모습에 동화되어 함께 다소곳하게 듣고 있다. 아이들은 역사가 알지 못한다. 다만, 어른들을 통해 배우고 익히면서 서서히 의식 속에 밀처럼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밀은 뿌리를 쉽게 땅에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매서운 날씨가 풀리면 웃자라는 밀을 밟아 들뜬 뿌리의 활착을 도와야 한다. 아이들의 생각은 밀과 같다. 그게 어른들의 몫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청주역사문화기행을 온 부모의 마음은 다 그러하리라.
“이것은 사면조각이지요. 통일신라 직후, 옛 백제 땅인 충청도 연기 지역에 ‘불비상’이라는 불상이 나타났어요. 형태는 비석인데 그 안에 부처의 모습을 조각하고 기원의 내용을 담은 것이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방학숙제를 내줬는데 연기지역에 있는 한 사찰에서 발견된 사면조각을 어느 대학생이 숙제로 제출한 거죠. 난리가 난거죠. 연기는 세종의 전신이니, 아마도 신생 도시인 세종시의 역사관을 정립한다는 면에서는 엄청난 보물인 셈입니다.”
강태재 선생은 차근차근 설명을 하면서 재미난 에피소드를 곁들인다. 아이들은 딱딱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주변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역사의식이 저절로 흘러들어가는 이치다.
부모님과 함께 온 유지선(동주초, 6)학생은 “재미있어요. 교과서에서 사진으로 보던 물건들을 직접 보니 신기해요. 어떻게 이런 역사유물들이 발굴되어지는지 알려주니 더 흥미롭고 귀에 쏙쏙 들어와요.”라고 말한다.





보살사, 천년의 숲으로

보살사의 여름 숲은 저 홀로 당당하다. 인간이 바라보아도 그저 작용(作用)으로 가득차서 늘 바쁘고 번잡하다. 인간은 자신들이 자연 속에 펼쳐놓은 흔적을 찾아 기억하고, 의미를 둔다. 경남 합천 해인사 일주문의 주련에 ‘천겁의 긴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만세를 뻗쳐 항상 지금이다.’라고 써져 있다. 지금 강태재 선생은 천겁의 긴 역사의 강물에 손으로 뻗어 함께 공유하자고 한다.
보살사는 청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이란다. 강태재 선생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환선사, 선림사, 영천사가 모두 낙가산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오직 보살사만이 맥을 이어오고 있다. 보살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산이 낙가산이다.” 라며 “567년 신라 진흥왕 때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으니 1천5백년이 넘은 고찰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릴 적 소풍 단골 장소였던 보살사가 천년이 넘은 고찰이라니 놀랍기만 하다.
“상공회의소 경제연구소에 있을 때, 여러 기업인들과 이야기를 하면 충청도 사람에 대한 인식이 싫었다. ‘합바지’ ‘멍청도’ ‘느리다.’라고 하는 충청도에 대한 인식이 충청도가 지리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점령하고 빼앗기던 곳이라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남의 눈치를 보는 습관이 오랜 역사를 통해 몸에 배인 탓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건 그들의 시각일 뿐이다. 오히려 충청도 사람들은 합리적이며 은근하다. 그만큼 함부로 부화뇌동하지 않으니, 신중하다. 그런 말을 듣고 오기가 생겼다. 정말 우리 고장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것은 전과 같지 않다.’라고 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의 말처럼 강태재 선생은 충청도를 사랑했고, 알게 되자 역사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강태재 역사해설사는 청주상공회의소에서 정년을 하고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공동대표, 직지포럼 대표, 충북아트페어 조직위원장,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각 신문사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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