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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파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 승경란, 그는 은입사(銀入絲), 순우리말로는 은실박이 장인이다. 두꺼운 철판을 만 번쯤 두드려 홈을 만들고, 그 틈에 순도 99%의 은실을 끼워 넣는 작업을 한다. 작품을 그냥 보면 어디에 홈이 있는지, 어떻게 은실을 박았다는 건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정교함에 감탄할뿐. 은입사를 자세히 알려면 승경란, 그를 봐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온 세상이 다 나의 공방 멀리서 한 여인이 뛰어왔다. 손에는 투박한 머리빗이 들려있었다. 사진 찍을 일이 있어서 머리빗을 빌리러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작업을 하던 중이었는지, 몸에는 앞치마가 둘러져있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해봤자 이 여인에게는 머리빗을 빌려오는 게 전부다. 이렇게 소박할 수가. “원래는 사진을 잘 안 찍으려고 해요. 잘 안 나오니까. 그런데 오늘 보니까 머리가 너무 부스스한 거죠. 얼른 가서 머리빗을 빌려왔어요. 주변 공방에서는 웬일이녜요. 머리빗을 다 빌리러왔느냐고.” 승경란은 동두천의 공방거리에 1년 5개월 전쯤 공방을 열었다. 이름은 ‘두두리 공방’. 겉에서 보면 마치 수공예 금속공방 같다. 공방 안 어디에도 그가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조교임을 알려두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기가 몹시도 수줍은, 승경란은 그런 사람이다. 쪼음질을 하는 승경란. 투박한 망치로 작은 정을 조금씩 옆으로 옮겨가며 두드리면 미세한 홈이 생긴다. “공방이 없을 때는 온 세상이 다 제 공방이라고 생각했어요. 26년 동안 어디를 가든지 작업을 싸가지고 다녔죠. 차를 타고 다니다가 나무 한 그루가 너무 좋으면 거기에 펼쳐놓고 쪼음질을 하는 거예요.” 작업이라 함은 일단 무거운 철판이 필요했다. 그 철판에 미세한 홈을 만들 망치와 뾰족한 정도 있어야 한다. 이 도구들을 가지고 다니다가 마땅한 곳이 나오면 자리를 깔고 쪼음질을 했던 거다. 쪼음질은 새가 부리로 먹이를 쪼듯, 뾰족한 정 끝으로 철판을 계속해서 쪼아대는 걸 말한다. 투박한 망치로 작은 정을 조금씩 옆으로 옮겨가며 두드리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홈이 생긴다. 덕분에 땜하지 않고도 은실이 단단하게 철판에 박힌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면 분명 불평을 한 바가지 쏟아냈을 것이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팔이 빠지도록 망치질을 하며 살아야 하나. 죄를 지어도 큰 죄를 단단히 지었나 보다’라고 피할 수 없는 숙명을 탓했을지도. 하지만 그는 이 반복적이고 단순한 망치질을 ‘신선놀음’이라고 표현했다. 소풍 가듯 어디든 자리를 펼치면 공방이 됐고, 무엇보다 ‘탕탕탕’ 정을 내리치는 장쾌한 소리를 마음껏 들을 수 있었다. 아파트에서는 적잖이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넓은 공원, 시원한 개천가에서는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듯 마음껏 정을 두드릴 수 있었다. (좌) 입사란 금속기물의 표면을 정으로 홈을 새겨 다른 금속을 끼워 넣어 무늬를 놓는 기술, 그리고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입사장이라고 한다. (우) 은입사를 할 때 쓰는 망치부터 뾰족한 정까지, 모두 손수 만든 것들이다. 차가운 홈에 새겨 넣는 마음 쪼음질이 끝난 철판에 반짝이는 은실을 채워 넣을 때면 설레기까지 했다. 차가운 철판에 따뜻함을 채워 넣는 일. 은입사는 홈을 파낼 때까지는 굉장한 강인함이 필요하지만, 틈을 채워 넣을 때는 반대로 굉장히 부드러워야 하는 상반된 일이었다. “원리는 아주 간단해요. 치고 박고죠. 그런데 왜 이렇게 세월이 오래 걸리느냐면, 앉아서 하는 그 작가의 정신이 있어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 그래요.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마음가짐이죠.” 스승인 홍정실(국가무형문화재 제78호 입사장 보유자)에게 배울 때도 늘 가면 같은 것만 연습해야 했다. 방 한켠에서 열심히 망치질을 하고 있으면 들리는 ‘경란아!’ 소리. 신기하게도 조금만 딴생각을 해도 스승은 다 알아채곤 했다.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일정한 소리를 내기까지 그는 철판이 아닌 마음을 두드렸다. “저는 전통문양을 굉장히 사랑해요. 지금 봐도 굉장히 세련되고, 싫증나지 않으면서도 품위 있다고 할까요. 하지만 전통문양을 통해 새로운 표현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전통을 보존하는 건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자리에서 머무르는 게 아니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은입사로 목걸이나 가락지 같은 장신구를 만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자들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구를 전통으로 채워주고 싶었다. 그래서 액세서리 세공도 따로 배웠다. 덕분에 은입사를 표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더욱 다양해졌다. 전통 화로나 향로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전통문양에 승경란의 감성이 자연스레 스며든 것. 여인의 수줍은 마음이라든지, 가을바람 같은 것을 주로 표현했다. 공방을 찾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반지나 목걸이를 구경하러 들어왔다가 이내 은입사에 감탄하며 돌아갔다. 01. 그녀는 은입사라는 일이 얼마나 좋은지 붉게 녹슨 철조차 사랑스러워 보인다고 말한다. 02~03. 그의 공방에는 어느 것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크고 화려한 것은 그것대로, 작고 소박한 것은 그것대로 아름답고 소중하다. 04. 작품을 대할 때 온 마음을 다하는 전수자의 손길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의 공방에는 어느 것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작품구상이 떠올랐던 순간, 만들었던 과정들이 생각나서 사실은 작은 장신구 하나도 팔고 싶은 마음이 없다. 공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작품을 소개해주는 그는 마치 자식 자랑을 잔뜩 늘어놓는 어머니와도 같았다. “거짓말 같겠지만 저는 이 철판을 한 번도 차갑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아무리 내가 옷을 좋은 걸 입어도 가슴에 안을 수 있어요. 붉게 녹슨 철판도 사랑스럽고 예뻐 보여요.” 승경란은 자신이 은실을 박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고 했다. 사람하고도 인연이 있듯, 은입사와의 만남도 운명 같다고. 그래서 그는 은입사를 할 때 쓰는 망치부터 뾰족한 정까지, 모두 손수 만들어 쓰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대충인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도 없다. 또한 주인을 닮아 투박한 망치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은실박이 자체가 너무 소중하니까, 우리나라의 가장 소중한 게 뭔가를 생각했어요. 전통 기법을 가지고 가장 소중한 걸 담아내고 싶었죠. 그러다가 생각난 게 우리나라 국기예요. 은입사로 된 국기함을 멋지게 표현해서 국민 모두에게 국기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싶어요. 외국인이 봐도 감탄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승경란의 가슴엔 전통이라는 홈이 하나 깊게 파여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은입사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사랑스럽게 표현할 수도 없다. 차가운 쇠붙이, 망치, 뾰족한 정, 어느 것 하나 부드러운 것이 없지만 이마저도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역시 승경란의 사랑스러움 덕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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