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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퇴계를 만나 행복했네 40년을 기다린 만남

2019-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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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퇴계를 만나 행복했네 40년을 기다린 만남
'퇴계 이황의 「유소백산록」'

    이황의 소백산 유람은 명종 4년 1549년 4월,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퇴계는 그 전해 11월에 풍기군수가 되어 다음 해부터 백운동서원에서 강학하게 되면서 그간 40년간 지나다니면서 그리워하던 소백산 유람의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퇴계는 소백산에서 사흘 밤을 지냈다.


 


퇴계의 노정
    첫째 날 퇴계는 죽계, 초암사를 거쳐 석륜사에서 첫 밤을 지낸다. 현대의 많은 소백산행 자료에는 죽계구곡이 묘사되고, 이 구곡을 퇴계가 이름 지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죽계구곡이란 명칭은 소백산 유람기는 물론 퇴계집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재향지에 의하면 죽계구곡은 영조 3년 순흥부사를 지낸 신필하(申弼夏)가 지은 것이다. 석륜사는 신라 때 지은 절로 알려졌고, 현재 빈터만 남아있다. 퇴계는 산행 중 걷거나 말과 수레를 번갈아 탔다.
둘째 날에는 중백운암에 올랐는데 길이 더욱 가팔라 겨우 산꼭대기에 이른 후에야 가마를 타고 석름봉으로 갔다. 석름봉 동쪽에 자개봉이 있고, 또 그 동쪽 몇 리에 높이 솟은 봉우리가 국망봉이다. 만일 청명한 날씨를 만나면 용문산으로부터 서울까지 바라볼 수 가 있는데, 이날은 산안개와 바다의 운무가 자욱하게 끼어서 용문산도 바라볼 수 없었고 오직 서남쪽 구름사이로 월악산이 희미하게 비칠 뿐이었다고 쓰고 있다. 퇴계의 시 〈국망봉〉에서 “연기구름 아득아득 늦으막에 피어나서 용문산 덮혔어라 수문이야 일러 무삼,”이란 구절은 이를 묘사한 것으로, 용문사조차 안 보이니 대궐문이 어찌 보이겠느냐는 답답한 마음이 함축되어 있다. 둘째 날도 석륜사에서 지냈다.
    셋째 날에는 주세붕을 포함해서 유람객들의 발길이 없었던 서쪽 골짝의 등산을 감행한다. 퇴계는 소백산 등 산 노정을 사찰과 인적이 통하는 세 골짝으로 나누었는데, 초암과 석륜사는 산의 가운데 골짝에 있고, 성혈사와 두타사 등은 동쪽 골짝에, 세 가타암은 서쪽 꼴짝에 있다. 그는 자신이 쇠약하고 병들어 온 산의 경치를 다 보기가 어려워서 서쪽 골짝만 찾기로 했다. 따라서 서쪽 골짝은 퇴계를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퇴계는 상가타암을 찾아 올라가 지팡이를 짚고 돌길을 더위잡아 환희봉에 올랐고, 여기서 퇴계의 새로운 명명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날은 관음굴에서 지냈다. 관음굴 역시 현재는 없어진 곳이다.

 
01.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 퇴계 이황은 49세에 백운동서원에서 강학하게 되면서 40년간 그리워하던 소백산 유람의 뜻을 이루었다
02. 소백산 초암사(草庵寺) 앞의 제1곡을 시작으로 삼괴정 근처의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2㎞에 걸쳐 흐르는 죽계구곡
03. 석름봉 동쪽에 자개봉이 있고, 그 동쪽 몇 리에 높이 솟은 봉우리가 국망봉이다.
 
 퇴계가 그리는 소백산의 미
    퇴계는 그렇게 바라던 소백산 유람이었지만 담담했고, 그가 그리는 산수는 담박했다. 무엇보다 그의 묘사는 간결하면서도 실경 그대로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골짜기 사이에 울려 퍼지는 물소리 — 첫째 날 죽계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가니, 골짜기는 그윽하고 깊으며 숲속은 아늑하고 아름다웠고, 때로 물이 돌 위로 흐르며 부딪히는 소리가 골짜기 사이로 울려 퍼졌다고 했다. 초암사 서쪽 바위에 앉아서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고 아래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운취가 빼어났다고도 했다. 퇴계가 이렇게 아름답다고 칭찬한 곳은 산과 물이 조화로운 곳이고, 그는 특히 물소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보인다. 비단 병풍 속을 거니는 듯 철쭉꽃 숲을 지나 — 둘째날 유산은 국망봉까지이고 국망봉은 이 유람의 핵심이 된다. “석름·자개·국망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 9리 사이에 철쭉이 우거져 한참 난만하게 피어 너울거려서 마치 비단 병풍 속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 불의 신 축융의 잔치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매우 즐거웠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퇴계는 무장해제된 느낌이다. 시 일곱 장을 짓고 술 석 잔을 마셨다. 국망봉에서의 흥취 때문이었을까, 처음 이 산을 오를 때 기운을 비축하기 위해 지나쳤던 제월대를 내려가면서는 남은 힘이 있으니 올라가보자고 했다. 비록 그러했으나 제월대는 지세가 외지고 까마득하여 정신이 아찔하고 떨려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고 했다. 퇴계의 솔직한 묘사가 마음에 든다.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었네 — 셋째 날 ‘용기’를 내어 올라간 환희봉 서쪽의 여러 봉우리들은 숲과 골짝이 더욱 아름다워 퇴계가 모두 전날에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고 기술한 것을 보면. 확실히 소백산은 이제 퇴계의 산행을 통해 그 절경이 드러난 것이다. 서쪽으로 석봉이 가파르게 치솟았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데도 소나무·삼나무·철쭉이 우거져 뒤덮고 있어 유람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사람들을 시켜 가린 것을 찍어 내니, 멀고 가까운 데가 안보이는 것이 없어서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었다고 감탄했다. 이로 보면 소백산은 퇴계를 만나면서 그동안 숨겨졌던 미를 드러낸 것으로, 그곳은 산의 원근이 다 보이는 곳이라는 점에서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었다는 묘사가 이해된다.

 
01.매년 5월 절정을 이루는 소백산 철쭉     02. 철쭉이 만개한 소백산 비로봉      03. 소백산 국망봉의 돼지바위     04.소백산 비로봉 정상
 
도학자로서의 퇴계에게 소백산이란
    그렇다면 유학자로서 퇴계는 산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율곡 이이는 금강산 유람을 산수의 흥미를 찾아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나의 천진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에 비해 퇴계는 〈도산잡영〉 서문에서 산수 유람에서 도의를 좋아하고 심성을 기르는 데만 중점을 두는 것은 성인의 찌끼만 중시하는 것이라고 경계한 바 있다. 그러나 퇴계는 역시 도학자였다. 먼저 그는 소백산 유람에서 기질지성의 가변성을 확인했다. 국망봉에서 산 위의 찬 기온과 매서운 바람으로 나무가 자라면서 모두 동쪽으로 기울고, 늦게 잎이 나고 키가 자라지 않아서 깊은 숲과 큰 골짝의 것들과 매우 다른 것을 보고, 거처에 따라 기운이 변하고 기르는 것에 따라 체질이 바뀌는 것은 식물이나 사람이 같다는 점을 확인한다. 이러한 자연의 모습은 퇴계가 기질의 변화에 맞서 불변의 ‘理’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경건주의자로서 자기 학문에 대한 재확신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다음은 그가 명과 실의 일치를 추구한 점이다. 유학에서는 명실상부하지 않은 사람은 참되고 바른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퇴계는 서쪽 골짝을 올라가면서 옛 이름을 고치거나 새 이름을 부여했다. 그는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가 모두 불경의 말과 여러 부처의 음란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참으로 이 선경의 모욕이고, 유학자들의 수치였다고 하면서 이를 고친 주세붕의 업적을 높인 바 있다. 그러나 퇴계가 불교식 명칭을 모두 퇴출시킨 것은 아니다. 예로 화엄대와 금강대는 고승의 자취를 표시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지 않았고, 연좌봉도 고승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는 속되지 않고, 실상에 맞는 것을 명칭 변경의 근거로 들면서 산대바위를 자하대(紫霞臺)로, 자하대 북쪽의 두 봉우리를 백학봉, 백련봉으로 이름하여, 백설봉과 함께 모두 ‘백’으로 이름지었다. 소백산의 품격을 높이면서 명과 실의 일치를 추구한 것이다.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단계적인 도의 깨달음을 중시한 퇴계의 관점일 것이다. 국망봉에서 주세붕이 비에 닷새 동안 막혀 있다가 개자마자 바로 올라가서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퇴계는 자신은 하루도 막힘이 없었으니 어떻게 만리의 쾌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반문하면서도 등산의 묘미는 꼭 멀리까지 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불교의 돈오로 퇴계는 이를 등산의 묘미에 연관시켰지만 퇴계의 치학방식은 이와 다른 것이다. 소백산을 다녀간 인물들이 남긴 작품이 별로 없다는 점에 비판과 우려를 보여준 퇴계의 인문학적 성찰도 주목할 만하다. 산은 인물을 만나 빛나고 그들이 남긴 시문들은 산을 키우는 소중한 자원이 된다. 소백산은 퇴계를 만나 진정 행복했고, 퇴계의 소백산을 갖게 된 현대의 우리는 또한 얼마나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