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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학작품을 찾아서

2020-09-15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충북문학기행
조선시대 문학작품을 찾아서
'음성 권근과 김세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권근 삼대 묘와 신도비를 찾아간다. 상대별곡을 지은 권근, 용비어천가를 지은 그의 아들 권제, 권제의 아들 권람 등 삼대 묘 앞 마른 저수지에 따가운 햇볕이 고인다. 백일홍 붉은 꽃을 뒤로하고 찾은 생극면 팔성리에는 두 번의 유배를 겪어야 했던 김세필의 은거지가 있다. 그의 은거지 지천서원으로 가는 길 초입에서 김세필 문학비가 사람들을 반긴다.


용비어천가 지은 권제
 
(左) 권근의 상대별곡을 새긴 비석     (右) 음성 지천서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꽃이 피어 열매가 무성하게 열리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냇물이 되어 흘러 바다가 되나니-
    [용비어천가 2장]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1445년(세종27년)에 지어 1447년(세종29년)에 간행한 악장인 용비어천가의 2장이다.
    세종 임금이 조선을 세운 6대 선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대의 최고 학자이자 문장가에게 짓게 한 노래가 용비어천가다. 넓게 보면 조선 건국을 읊은 일종의 서사시이기도 하다.
    권제는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당대의 최고 지식인중 한 명이었다. 권제의 아버지인 권근은 1398년(태조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에 사형 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조선의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대제학을 거쳐 재상에 올랐다. 특히 문장이 뛰어나 동국사략 등 조정의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 권근이 시이자 악장문학인 상대별곡을 지었다. 상대별곡의 ‘상대’는 조선시대 사헌부를 말하는 것이다. 권근이 대사헌의 자리에도 있었으니, 그가 그 무렵 혹은 그 이후에 이 시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헌부의 분위기와 하는 일, 사헌부 소속 관원이 출근하는 장면, 일을 하는 관원의 모습, 임금과 신하가 어우러진 모습 등을 그리고 있다.

 
권근, 권제, 권람 삼대 묘 앞에 있는 신도비
 
권근 삼대 묘를 찾아가다
    권근과 그의 아들 권제, 그리고 권제의 아들 권람 등 삼대 묘와 신도비를 찾아갔다.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적한 시골마을 길 끝에 펼쳐진 너른 터 주변에 몇 기의 무덤과 기와집 여래 채가 눈에 들어왔다.
    기와집은 권근과 자손 두 명의 사당이다. 사당 건물 옆 낮은 언덕에 있는 무덤은 권근 후손들 무덤이다. 사당 건물 앞, 마당 한쪽에 권근이 지은 상대별곡을 새겨놓은 시비가 있다.
    권근, 권제, 권람의 묘는 너른 터에서 좁은 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나온다. 커다란 나무가 이정표처럼 서 있고 그 뒤에 권근 삼대묘가 있다. 권근 삼대 묘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곳을 능안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마을의 지맥을 끊기 위해 일제가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이어지는 길 중간에 땅을 깊이 파서 돌을 박았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줬다.
    아저씨와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서 권근 삼대 묘 앞 길을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밭 안쪽에 권씨 삼대의 신도비가 있고, 다른 한쪽 깊은 곳에는 공자와 주자, 안향, 그리고 9명의 현인을 모신 도통사가 보인다. 9명의 현인 중 단양문학기행 때 이야기한 ‘역동 우탁’도 있다.

 
지천서원 초입에 있는 김세필 문학비
 
지천서원에 있는 김세필 문학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있는 음성군 향토문화재 제1호 지천서원은 조선시대 중종 임금 때 이조참판을 지낸 김세필이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후학과 함께 학문을 이야기하고 시를 짓던 곳이다.
    서원 초입 홍살문 옆에 ‘십청헌 김세필 선생 문학비’가 있다. 문학비에는 권도원이 보내준 운율에 따라 읊었다는 머리말을 시작으로 그가 지은 시가 새겨졌다.

    늦게서야 빈 마을에 집을 짓나니 
    이름을 물으면 그 뜻을 알 수 있으리
    돌이켜보건대 나는 거백옥이 아니지만
    그가 한 일을 아름답게 여겨왔다네


    거백옥은 중국 위나라 사람으로 공자가 군자로 칭송한 인물이다. ‘늦게서야 빈 마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김세필이 지금의 지천서원 자리에 지은 초가를 말하는 것이다. 김세필은 조선 중기 사화에 연루돼 유배 생활을 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났지만 중종이 조광조를 사사하자 중종의 잘못을 상소했다가 장형을 치르고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그가 은거한 곳이 이곳이다.
    김세필 문학비를 지나 길을 따라 올라간다. 좁은 산골짜기 막다른 곳 계단 위에 지어진 기와집 두 채, 계단 위에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인상적이다. 현재 건물은 대원군 서원철폐령 이후 1898년부터 1936년 사이에 짓고, 1963년에 중수한 것이다.
    그 곳에서 김세필의 문중 사람을 만났다. 예로부터 서원이 있는 골짜기 마을을 제비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골짜기의 형국이 제비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커다란 소나무를 지나 건물 마당에 서면 멀리 팔성리 들녘이 골짜기 사이로 빼꼼 보인다.
    아무도 살지 않는 이 골짜기에 초가를 짓고 들어앉아 홀로 책을 읽고 시를 짓는 김세필의 모습을 상상하는 동안 제비골을 뒤로하고 홍살문에 도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