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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기(伐草記)

2020-09-23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벌초기(伐草記)
'글. 이정연'

    요즈음은 벌초할 때 너나없이 예초기를 쓰지만, 낫 한두 가락쯤 차 트렁크에 넣어갈 줄 안다면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봐도 괜찮다. 한두 번이라도 낫으로 벌초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예초기로 풀을 베면 온 산을 뒤흔드는 굉음에 선조께서 죄 놀라 무덤에서 일어나실까 죄송하기도 하지만 역한 풀 냄새가 가득해서 좋지 않다. 낫으로 풀을 베면 조용하고 은은한 풀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일하는 사람도 기분이 좋다.



    풀이 우거진 산길과 넓은 벌장(伐場) 전부를 낫으로 풀을 베라고 하면 뭘 모른다는 소리 듣겠지만 봉분(封墳)만은 낫으로 베는 게 좋다. 어디 꺼진 곳은 없는지 쥐나 뱀이 굴을 만들어 놓지나 않았는지 쑥이나 잡풀이 자리를 잡지는 않았는지 찬찬히 살피면서, 부모님 어깨라도 주물러 드리듯 벌초를 하다 보면 생전에 저지른 가벼운 불효쯤은 흔쾌히 용서해 주실 것이다.
    공원묘지나 특별히 잘 관리한 산소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억새나 잡초가 있기 마련인데, 이런 풀을 힘으로 베려고 하면 안 된다. 우선 낫은 약간 무게가 느껴지는 조선낫이 좋은데 잘 갈아서 가야 한다. 절대 급한 마음으로 힘을 주어 낫을 갈아서는 못 쓴다. 숙녀 다루듯이 부드럽게 무리한 힘을 가하지 말고 숫돌에 문질러야 날이 제대로 선다. 잘 갈아진 낫은 날 끝에 엄지손가락을 살짝 대보면     까슬까슬한 느낌이 난다. 이때 미끈한 느낌이 나면 날과 숫돌의 각도가 맞지 않아 옥간 것이다. 이것만은 경험이 좀 필요한 일인데 예민한 사람이라면 금방 눈치 챌 것이다. 손끝에 물을 찍어 숫돌에 놓고 낫을 문지를 때 낫 날 끝이 숫돌을 갉아 먹는 소리가 나서는 안 된다. 낫날과 숫돌의 각도가 거의 일치하도록 밀착시키고 가볍게 쓱쓱 문질러야 제대로 갈리는 것이다.
    이렇게 잘 간 낫으로는 풀을 벤다고 할 것도 없다. 낫만 갖다 대면 시퍼런 날을 보고 풀이 알아서 저절로 항복하듯 무너져 온다. 무딘 낫으로 쥐어뜯듯이 풀을 베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힘이 들뿐만 아니라, 뜨거운 햇볕과 장마를 견디며 씨 하나 맺고자 전력을 기울인 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을 앗는 게 불가피하다면 고통이라도 줄여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그것은 전장에서 잡혀 온 포로를 끌고 다니면서 욕보이는 졸장이 아니라 비록 적군이지만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한 전사를 단칼에 깨끗하게 베어 주는 덕장의 마음에 비길 만하다.



    풀을 벨 때는 절대 있는 힘을 다 쓰면 안 된다. 놀이하듯 즐기면서 손에 알맞게 한 줌 쥐고 힘의 60~70%쯤 쓰면 무난하다. 처음부터 있는 힘을 다해 급하게 풀을 베다가 곧 지쳐 조상을 원망하거나 오전도 지나기 전에 나가떨어지는 사람을 보았다. 산소 한 기쯤 마치고 나면 아무리 9월이지만 정수리도 따갑고 목도 탄다. 이때쯤 되면 이제 낫도 서서히 풀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럼 얼른 눈치 채고 그늘에 앉아 얼음물도 마시고 천천히 흘러가는 흰 구름도 보고 한 박자 쉬면서 다시 낫을 갈아주어야 한다. 미련하게 미적대고 있으면 손가락을 베 거나 더위 먹기에 십상이다.
    너무 오래 쉬면 안 된다. 낫도 갈았고 한 십여 분쯤 쉬었다면 나태라는 복병이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 일어서야 한다. 풀을 벨 때는 땅에 바짝 붙여 베야 한다. 언젠가 마치 소가 뜯어먹은 것처럼 들쑥날쑥하게 풀을 베는 사람에게 왜 그런가 물으니까 '처가 벌초는 원래 그렇게 하는 게 아니냐?'고 웃던데 그럼 저만치 오던 복도 물러간다. 노년에 행복하려면 미리미리 아내에게 사랑의 적금을 부어 두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풀을 베면서 잔돌이나 썩은 나뭇가지가 날아와 있는데 그대로 보고 지나친다면 부모님 옷에 묻은 티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과 같다. 그런 것들까지 집어서 풀숲으로 던져 버리고 뒤를 돌아보면 막 이발을 끝낸 부모님이 나란히 서 계신 것처럼 기분 좋다.
    이 모든 일을 기쁘게 마쳤다면 칡 잎 몇 장 따서 상석을 닦아내고 가져간 술이나 한잔 부어 놓고 절을 올리면 멋진 마무리가 된다. 부모님께도 술 한 잔 권해 드리고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 들으며 나도 한 잔 음복하다 보면 자식 도리를 다했다는 기쁨으로 가슴 뿌듯하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까지 산소 곁에 머물다 보면 부모님은 평소 힘들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실지 모른다. 내 눈으로 보면 아득하던 길도 부모님의 심안을 빌면 길이 보이는 법이니까.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내려다보며 벌초하는 일은 이렇게 자식이 된 도리를 다하는 것 같아 마음이 가벼운데 올해는 다투어 벌초도 오지 말고 추석에도 마라고 한다. 고향 후배에게 벌초를 부탁하고 나니 쓸쓸한 마음이다. 산소 옆 알밤이 지금쯤 바람에 툭툭 떨어질 텐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너무 많은 걸 앗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