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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지치기

2023-06-14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가지치기
'글. 박종희'

    친정집 지킴 나무가 갱년기를 맞았다.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던 머루나무다. 단단히 뿌리내려 마당을 지키던 나무가 푸르고 무성하던 머리를 한껏 풀어헤쳤다. 나무도 눈치챈 것일까. 더는 자기를 바라봐 줄 사람이 없다는 듯 잎을 매다는 것도 꽃을 피우는 일도 시들해졌다.
    마당을 오가며 만져주고 칭찬해주던 아버지가 힘이 되었을 머루 나무. 주렁주렁 매단 머루 송이를 자식 다루듯 하던 아버지의 온기를 나무는 아직도 기억하는 것일까.
    첫해엔 맛 배기만 보여주던 머루나무가 이듬해에는 가지가 벌어지도록 열매를 매달았다. 마당을 드나드는 아버지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촘촘하게 알이 박힌 머루 송이가 장하다고 나무를 쓰다듬었다. 친정에 갈 때마다 신기했다. 도저히 나무 구실을 못 할, 사시랑이 같던 묘목이 과일나무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것이 말이다. 
    태양이 머루 알을 먹빛으로 물들일 때쯤이면 머루 알에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그맘때쯤 아버지는 자식들을 친정으로 불러들였다. 머루 향이 달큼하게 풍기는 나무 아래서 자식들과 삼겹살 파티를 하고 싶어서였다.



    하나, 머루알이 여물어 갈 무렵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 사랑만 믿고 으스대던 나무에 골병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 없이 열매를 맺은 머루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찢어졌다. 양분이 부족해 말라가는 살점에 벌레가 끼기도 했다. 어깨가 휘어지며 무게를 견디지 못해 떨어지는 열매도 있었다. 
    과실나무를 처음 키우던 아버지가 미처 나무의 속까지 어루만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잔가지와 곁가지를 쳐내 잡생각을 없애줘야 하는데 몸집을 불려 가는 나무의 기특함만 봤던 것 같다. 
    이듬해 겨울, 아버지는 작정했다는 듯이 큰 가위를 가지고 머루나무 앞으로 갔다. 싹둑싹둑, 철없이 뻗어 나온 곁가지를 쳐내고 될 성싶은 가지만 남겼다. 아깝지만, 나무를 다 상하게 할 수 없지 않은가. 
    잎이 무성해 마당 한가운데 그늘을 만들어주었던 가지와 잎을 쳐내고 나니 머루나무가 한층 깐동해졌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이 뭐가 있을까. 과즙이 많아 새콤달콤 맛있는 머루도 하루아침에 붉어진 것이 아니었듯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욕심 때문에 가지치기를 못한 세상이 뒤숭숭하다. 언제부턴가 청소년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문명의 발달과 높아지는 지능 못지않게 범죄도 흉악해졌다. 
    갈수록 초범자들의 나이가 낮아지고 죄질도 점점 나빠진다. 범죄도 학습이 되던가. 촉법소년이 늘어나며 더 대담해지고 뻔뻔해지니 말이다. 더러는 죄를 저질러 놓고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중학생 여럿이 친구 한 명을 괴롭혔다. 예닐곱 명이 한 친구를 때리고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폭언을 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 게시판이 뜨거워졌다. 두들겨 맞아 만신창이가 된 학생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지만, 때린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학교에 다녔다.
    뉴스에 오르내리고 익명의 게시판에도 가해 학생들을 처벌하라는 글이 올랐다. 하지만, 가해 학생의 부모들이 자식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거나 학교에서도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더 기막힌 것은 피해 학생이 맞으면서 상대를 때렸기 때문에 쌍방폭행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죽을 때까지 맞고만 있어야 엄벌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기사를 보면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떠올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20여 년 전 딸애가 중학교 다닐 때 같은 학교 선배들한테 괴롭힘을 당할 뻔했던 적이 있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딸애는 그들 앞에 불려 갔다. 서너 명씩 몰려다니는 그 애들은 고개도 못 들고 벌벌 떠는 딸애의 지갑에서 푼돈을 빼앗고는 돌려보냈다. 크게 다치지 않고 돈만 빼앗긴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딸애는 한동안 학교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더구나 그 당시는 문제아들이 몰려다니며 약한 학생을 괴롭히는 것에 우쭐함을 느끼던 때라 딸애가 제시간에 오지 않으면 애가 탔다. 
    자식이 친구들한테 맞아 만신창이가 되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부모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기 자식들이 두들겨 맞았다고 바꿔 생각해보면 좋으련만. 그렇게 쉬운 문제 해결도 현실로 부딪히면 어려워지나 보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학생들과 자식의 죄를 덮어주기에 급급해하는 부모들의 모습 때문에 맞은 학생은 더 아프다. 더구나 피해 학생을 쌍방 폭행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내 살이 아프면 남의 살도 아프다. 세상에 자기 살 파먹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으랴.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햇빛도 들지 않는 보호 감찰 소의 차가운 바닥에 앉아 지낼 일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하나, 자식을 병치레 없이 건강한 나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지 않은가.
    귀한 자식일수록 가지치기를 잘해주어야 튼튼하게 자랄 수 있다. 어느 누구의 살점인들 귀하지 않을까만 병든 가지를 쳐내야 다른 가지에 전염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가지치기를 한 뒤 머루나무는 굵고 단단한 머루 송이를 오지게 매달았다. 아마, 그해부터였지 싶다. 찬 서리가 내리면 아버지의 정성이 들어간 머루 즙이 택배로 배달되었다. 기관지가 약한 딸을 위한 아버지의 귀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일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머루나무가 갱년기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동생이 다시 가위를 들었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시름시름 앓는 머루 나무 가지를 말끔하게 쳐냈다. 풀어헤친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게 빗질해주고 밑동에 흙도 북돋아 주었다. 오래전 친정집에 뿌리내리던 날처럼 잡다한 생각들을 잘라주고 나니 나뭇가지에도 생기가 올랐다. 
    호수로 물을 주며 아버지가 하시던 것처럼 나무에 말을 건넸다.
    “너도 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게로구나! 그래, 충분히 아파하고 다시 푸르러지렴. 아버지도 그걸 원하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