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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023-06-14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글. 유병숙'

    복잡한 현실에서 훌쩍 벗어나고 싶으면 도심에서 가까운 강화도를 찾곤 했다. 그곳에 이색 카페가 생겼단다. TV 방송 덕분에 유명세를 탄 그 카페는 핫 플레이스 데이트 코스, 빈티지 미술관, 우리나라 섬유의 역사지 등으로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그 길로 차를 몰았다. 
    카페 입구 조형물에 조양방직이라 새겨진 간판이 보였다. 그 너머로 슬레이트 지붕의 허름한 공장이 나타났다. 강화도 조양방직은 1933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레이온 원단 생산 공장으로 한때 섬유산업을 선도했다. 주지하다시피 방직공장들은 1970년대 정부의 방침에 따라 대구나 구미로 옮겨갔고 당시의 명성은 유명무실해졌다. 화재로 많은 곳이 소실되어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공장은 2018년에 이르러서야 거대한 빈티지 갤러리로 탈바꿈했다. 공장의 파란만장한 연혁이 마치 고달픈 인생사처럼 다가왔다.
    넓은 마당에는 갖가지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공중전화 부스와 다이얼식 전화기, 빛바랜 여신상, 뻘건 녹을 뒤집어 쓴 난로, 철 수레에 실린 스타킹 마네킹, 고장 난 고물 버스, 펑크 난 손수레, 크고 작은 목마들 등등 곳곳에서 옛 풍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시커멓게 그을린 네모반듯한 건축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공장의 금고였다. 공장이 성업 중일 땐 삽으로 돈을 퍼 넣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지붕 위 황소 조형물이 기세등등했다. 기 받아 가라는 푯말에 마음이 동해 내부로 들어갔다. 알전구 밑에 달랑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옛 영화가 한낱 물거품처럼 느껴졌다.   



    공장 안 천장에는 얼기설기 얽혀있는 대들보와 서까래가 드러나 있었다. 마감재가 떨어져 나간 벽마다 시멘트 블록이나 벽돌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들은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무엇도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온전히 실감하게 했다.  
    테이블이 길게 두 줄로 놓인 장면은 마치 대형 영화 세트장처럼 보였다. 아마도 옛 공장의 생산라인인 듯했다.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천장의 유리창으로 밝은 채광이 쏟아져 내렸다. 낡은 의자에 앉은 관람객들이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서 시간은 유독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심리적 시간의 속도와 질량은 공간의 차이와 추억의 무게에 따라 달라지는 걸까?
    커피를 가지러 가는 통로에는 액자들이 줄지어 걸려있었다. 작자 미상의 철 지난 누드화, 정물화, 인물화들이 눈길을 끌었다. 무심결에 낯익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푸시킨(Aleksandr Sergeyevich Pushkin, 1799~1837)의 시가 박힌 그 유명한 이발소 액자였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었다. 불쑥, 그때 그 시절이 눈앞으로 튀어나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찾으러 가곤 했던 이발소, 그 벽에도 예의 이 액자가 걸려있었다. 아버지의 이발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뜻도 모르는 그 시를 읽다 보면 알 수 없는 애틋한 슬픔이 가슴속에 일렁였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 노여워도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라 믿어라.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건 한순간에 지나가나니,
    지나간 일은 다시 그리워지는 것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전문

    시를 쓸 당시 푸시킨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1세에 의해 추방되어 유배 생활 중이었다.  그 시구가 이국 만 리 머나먼 이곳 허름한 이발관에서 촌부들의 심심한 위로가 되었다는 걸 시인은 알고나 있을까? 바가지로 부어주는 물에 머리를 감고 있다 나를 보고 찡긋 웃곤 했던 아버지가 새삼 그리웠다. 액자 앞에서 나는 멍하니 아버지를 읽고 있었다.  
    한 시절 흔하게 보았던 괘종시계, 앙증맞은 미키마우스 인형, 손때 묻은 도널드 덕 모자, 엘비스 프레슬리가 마이크를 들고 노래하는 조각상, 마릴린 먼로가 바람에 치마를 날리는 조각상, 연주할 때마다 아직도 잊지 않았다는 듯 풍풍거리며 옛날을 소환하는 풍금, 타이어를 개조해 만든 탁자와 재봉틀을 고쳐 만든 식탁,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의 의자들, 뒤뚱거리는 책상, 망가진 타자기 등이 은근하게 옛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만지고 쓰다듬고, 앉아보고, 기대다가 문득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 떠올랐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의 노래처럼 저마다에 배어있을 절절한 이야기를 한꺼번에 듣고 있었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시간을 잊고 앉아 있었던 걸까? 갑자기 추위와는 다른 한기가 느껴졌다. 나도 이미 추억의 부장품이 된 건 아닐까? 내 치열했던 삶의 궤적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쩌면 나도 이미 박제된 박물관 속 또 하나의 풍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왔고, 살아간다는 자체가 시간의 박물관 같은 건 아닐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던 옛 인정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소중했던 시간들이 서서히 나를 깨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