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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불을 찾아 신화 속으로

2017-05-19

라이프가이드 여행


와불을 찾아 신화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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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주사에서 지금 우리가 만나는 돌부처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 세기 전만해도 운주사의 돌부처와 석탑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한 점 돌부처가 되어 이 가람에 들어앉은 듯 했다. 그러나 일제와 한국전쟁 등 험난한 시절을 헤쳐 오면서 돌부처와 석탑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다. 더러는 집을 지을 때 기둥 고임돌로 쓰였다. 누군가 죽으면 무덤 앞에 상돌로 쓰기 위해 가져갔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쌓는 축석으로 쓰인 것도 지천이다. 당시만 해도 누구 하나 이 돌부처와 석탑에 눈길을 주는 이가 없었다. 발에 채이고 널린 게 돌부처이고, 석탑이었으니 그 중 몇 개 가져간다고 문제될 게 아니던 시절이었다.
    그 험한 시절까지도 견디고 남은 돌부처와 석탑이 지금 운주사에 있는 것들이다. 천불산에서 가지 쳐 나간 두 개의 산줄기가 만든 길고 비좁은 계곡을 따라 돌부처와 석탑이 서 있다. 더러는 제 힘으로 설 수 없어 바위에 기대어 있기도 하고, 더러는 무거운 몸을 주체하지 못해 아직도 누워 있다. 뿐만 아니다. 아직도 발굴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계곡 어딘가에 쑤셔 박혀 있을 돌부처도 지천일 것이다. 그만큼 이 절에는 돌부처와 석탑이 많다. 운주사에는 지금 탑 19기, 돌부처 93구가 전해진다. 일제 때만 해도 지금보다 2배나 많았다고 한다.




시간의 강을 건너며 얼굴 잃은 돌부처들

    운주사의 돌부처는 형체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천년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겨 얼굴이 지워진 것이 대부분이다. 분명 눈과 코와 입을 새겨 넣었을 테지만 남아 있는 돌부처는 어렴풋한 형체만 존재한다. 어떤 것은 가사와 몸체가 아주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대부분 얼굴이 지워진 것들이다. 누군가 일부러 얼굴을 지워버렸거나 세월이 할퀴고 간 것이다. 얼굴 없는 돌부처들. 시간이란 긴 강을 건너오면서 상처받고 할퀴어 스스로가 누군지도 모르는 돌부처들. 바로 이 돌부처가 있어 사람들은 운주사를 찾을 때마다 경외의 마음을 갖게 된다. 어쩌면 돌부처는 바라보는 이들 자신일 수 있다. 이 돌부처를 새긴 이들은 부처를 새긴 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돌에 조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운주사의 돌부처와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은 돌부처가 민초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주사의 돌부처는 고압적이거나 높은 곳에서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비록 형태는 지워졌지만 이 땅에 살아왔던 농투성이들처럼 순박하고 꾸밈이 없다. 민중의 심성을 가진 돌부처는 결코 한국인에만 감흥을 준 게 아니다. 2008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도 몇 해 전 운주사를 찾았다가 천불천탑에 감명을 받고 시 를 남겼다. 운주사는 가람 배치가 빼어난 절이 아니다. 국보급 문화재를 품고 있지도 않다. 산세가 절경이거나 깊고 그윽한 계곡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운주사의 저력은 무수한 석불과 석탑에 깃든 설화에서 나온다. 운주사를 창건한 이는 풍수지리의 뼈대를 세운 신라 말의 선승 도선국사로 알려졌다. 도선은 한반도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형국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배는 중심이 동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이는 백두대간에서 가지 쳐 나간 낙동정맥이란 큰 산줄기 탓이다. 따라서 서쪽에도 무거운 것을 만들어 균형을 맞춰줘야 했다. 그래서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와불이 일어서는 날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전설

    운주사가 간직한 설화의 백미는 와불에 있다. 천불산 왼쪽 기슭에는 높이 12m, 폭 10m에 이르는 와불이 있다. 이 와불은 혼자가 아니다. 좌상과 입상을 한 돌부처 2기가 나란히 누워 있다. 와불은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다. 그것도 산등성이를 뒤덮을 만큼 커다란 크기의 와불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독특한 와불에 소설가 황석영은 문학적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황석영은 조선 숙종 때의 의적 장길산의 활약을 다룬 대하소설 [장길산]에서 와불을 용화세상으로 이끌 메시아로 등장시킨다.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이 이 소설에 묘사된 내용이다. 그러나 와불은 도선국사가 신통력을 부려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공사에 싫증을 느낀 동자승이 거짓으로 닭아 울었다고 고해 미처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돌아보는 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일주문에서 절에 이르는 길 주변의 돌부처와 석탑이다. 또 하나는 절집에서 오른쪽 천불산을 올라 공사바위에서 운주사를 내려다본다. 마무리로 절집에서 왼쪽의 능선으로 올라 와불과 석불군 라, 칠성바위를 아우른다. 이렇게 돌아보는 데는 1시간 30분쯤 걸린다. 그러나 석불 하나하나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시간은 한없이 길어진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우선 대웅전을 향해 창처럼 도열한 탑들이 반긴다. 불국사 석가탑처럼 비례와 균형미가 넘치는 탑은 아니다. 키가 껑충하게 큰 편이다. 높이는 7m를 헤아린다. 3기의 석탑 뒤로는 돌집을 지어 앞뒤로 석불을 모신 탑도 있다. 길 오른쪽으로는 석불군이 도열해 있다. 바위들이 지붕돌처럼 파여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한두 기의 돌부처가 서 있다. 돌부처가 바위에 어깨를 기대고 있는 산비탈 위에도 석탑이 솟아 있기도 하다.
    절집은 특별히 눈여겨 볼만한 것이 없다. 현대에 들어 복원불사를 한 당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마당 가운데 서 있는 석탑이 볼거리다. 탑보다도 탑 주변에 놓인 돌들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돌들은 한때 돌부처였거나 석탑이었던 것들이다. 분명 돌무처의 얼굴이었던 것임에도 그저 한갓 돌무덤으로 존재한다.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석불군마가 있다. 얼굴은 형체가 없이 지워졌지만 가사와 몸은 온전히 보존된 석불을 중심으로 몇 기의 돌부처가 벽에 기대어 서 있다. 그 앞으로는 기단 모양이 독특한 탑이 있다. 보통 탑의 옥개석은 팔작지붕처럼 들려 있는데 반해 이것은 복숭아처럼 동글다. 어디 이것뿐이랴. 운주사에 있는 석탑 가운데는 옥개석을 호떡처럼 둥글게 깎아 올려놓은 것들도 많다. 딱히 무엇이라 단언할 수 없는, 질서와 규범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양식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운주사의 석탑들이다. 석불군 마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두 기의 석탑이 있다. 오른편에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면 데크 위에 마애불이 있다. 운주사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애불이다. 워낙 마모가 심한데다 짙푸른 이끼까지 잔뜩 끼어 있어 눈에 힘을 주지 않고는 구별하기 힘들다. 그래도 얼굴의 윤곽은 분명히 남아 있다. 마애불에서 두어 걸음이면 공사바위에 닿는다. 이 바위는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공사를 감독하던 자리라고 한다. 공사바위에 서면 절에서 일주문을 향해 늘어선 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최근에 난 산불로 흉하게 타버린 나무들의 모습도 보인다. 검게 타죽은 나무들은 죽어서도 스러지지 않은 채 남아 고통의 시간을 증거한다.



돌부처는 부처가 아닌, 이 땅에 살다간 농투성이의 자화상

    다시 절집으로 돌아와 맞은편 능선을 오르면 2기의 탑이 서 있다. 역시, 길쭉하게 키만 크고 안정감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석탑들이다. 이 석탑이 놓인 커다란 마당바위 아래에도 석불군 라가 있다. 이곳에도 가사와 몸이 생생한 석불을 중심으로 크기가 제각각인 돌부처 10여기가 서 있다. 와불은 능선의 꼭대기에 모셔져 있다. 사람들은 와불을 돌아보며 ‘일어설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본다. 가로로 길게 누운 탓에 바라보는 이들도 목을 왼쪽으로 기울인 채 와불과 눈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잠시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와불 밑에는 원형으로 깎아 놓은 7개의 바위가 있다. 큰 것은 지름이 3m 가까이 된다. 칠성바위라 불리는 이 돌들은 북두칠성을 본 떠 만든 것이라 한다. 혹은 이 원형으로 깎은 바위를 옥계석으로 쌓았던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정답이라 단정 지어 말 할 수 없다. 운주사 자체가 미궁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운주사의 석불 순례를 마칠 때쯤이면 도대체 누가, 왜, 이렇게 많은 돌부처와 탑을 조성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점점 커지게 된다. 당시의 기술로는 일으켜 세울 수도 없는 와불을 비롯해 형식과 틀을 무시한 탑과 석불의 파격미는 궁금증을 넘어 당혹감을 안겨준다. 돌부처는 말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 바위에 기대어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전부다. 혹여 그 대답은 와불이 간직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전설처럼, 새 세상이 열리는 날 와불이 벌떡 일어서서 이 산에 천불천탑을 조성한 연유를 털어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운주사 석불 순례길 여행 정보



    운주사는 공사바위와 와불로 올라가는 몇몇 코스를 제외하고는 평지를 걷는 것처럼 편안한 길이다. 노약자와 어린이도 부담없이 돌아볼 수 있다. 서둘러 돌아보면 1시간도 충분하지만 석불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다보면 2시간도 모자란다. 겨울에 눈이 내렸을 때나 비가 온 뒤에는 미끄러짐에 조심한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가 걷기 좋다.

   
가는 길
    운주사는 광주를 거쳐 간다. 경부와 천안~논산,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동광주IC로 나온다. 광주 제 2외곽순환도로를 따라 가다 소태IC로 나오면 29번 국도와 만난다. 29번 국도를 이용, 화순읍과 능주를 지나 춘양에서 822번 지방도를 따라 가거나 능주에서 도곡을 거쳐 간다. 대중교통도 광주를 이용하는 게 편리하다.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광주까지는 5분 간격으로 고속버스가 운행한다. 광주터미널에서 운주사로 가는 시내버스는 20~50분 간격으로 있다.

   
맛집
    화순은 남원과 함께 전라도에서 추어탕을 잘 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운주사 입구에도 추어탕과 추어숙회를 파는 집이 두어 곳 있다. 추어숙회와 추어탕이 인기다. 추어숙회는 달군 돌판에 양파를 깔고 매콤하게 익힌 미꾸라지를 놓는다.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두르고 미꾸라지 위에 부추를 얹어서 낸다. 추어숙회는 초장을 찍어 깻잎에 싸먹는다.

   
추가정보
    여행하기 좋은 시기: 가을~봄    주소: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운주사)    총소요시간 : 1시간 30분
문의 : 화순군 문화관광과(061-370-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