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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자의 계곡, 아홉가지 경치를 찾아서

2019-07-25

라이프가이드 여행


충북 어디까지 가봤니
은둔자의 계곡, 아홉가지 경치를 찾아서
'괴산 갈은구곡'

    갈은구곡에 숨어있는 아홉 가지 경치를 찾아 몇 번의 발길을 놓았었다. 그때 마다 몇몇 경치는 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이십 여 년이 그렇게 흘렀다. 지난 6월 말, 갈은구곡을 다시 찾았을 때는 갈은구곡 선국암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 속 옛 선인을 만난 것 같았다. 여든이 넘으신 마을 어른신이 신선처럼 길을 인도했다. 오래 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 이야기에 갈은구곡의 아홉 가지 경치가 더 빛난다. 
은둔자의 계곡
    갈은(葛隱), 그 이름처럼 숨은 마을 갈은동은 은둔자의 거처였다. 북쪽에서 흘러내린 군자산 줄기가 마을의 동쪽과 남쪽까지 에워싸고, 남쪽의 옥녀봉에서 시작된 산줄기는 노적봉과 수리봉으로 흐르며 마을의 서쪽을 막았다. 터진 곳은 북서쪽 골짜기 밖에 없다. 3~4㎞ 정도 되는 그 골짜기 끝을 달천이 가로막았다. 그 골짜기에 들어선 마을이 지금의 갈론마을이다. 갈론마을의 원래 이름이 갈은마을이다. 1950년대 중반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갈은마을이라고 불렀다.



    갈은마을 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를 갈은구곡이라 한다. 옥녀봉 북동쪽 골짜기에서 시작해서 달천에 이르기까지 3~4㎞ 정도 이어지는 물줄기 중 약 2㎞ 정도 되는 구간에 있는 아홉 가지 경치에 이름을 붙여서 갈은구곡이라 불렀던 것이다.
    갈은구곡은 葛隱洞門(갈은동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 곳부터 물길을 거슬러 올라 선국암까지 이르는 약 2㎞ 구간을 일컫는다. 계곡 상류에 葛隱洞(갈은동)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그곳이 갈은구곡의 백미다.
    마을이 처음 형성된 곳도 갈은구곡이다. 갈은구곡의 시작을 알리는 葛隱洞門(갈은동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를 지나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옛 마을 자리가 나온다. 그곳에 서당도 있었다. 조선시대 당쟁의 광풍을 피해 은둔처를 찾아다니던 선비들이 첫 발을 디딘 곳이기도 하다. 나라에 공을 세워 토지를 하사 받은 양반도 있었고, 날 좋은 날이면 문방사우를 지참하고 이곳에 와서 시?서?화를 즐겼던 선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이 이 마을에서 정착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조선 말기 일정기간 동안 이 마을의 역사는 세월 속에 묻혔다.
마을에서 만난 어르신을 따라 길을 나서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을에 화전민들이 정착하게 된다. 원래 살던 사람들과 화전민들을 더해 70~80여 가구에 400명이 넘게 살던 때도 있었다. 화전민들이 짓던 농사 가운데 황기농사가 유명했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강원도 황기보다 갈론마을 황기가 더 좋았다. 전국 각처에서 이주한 화전민 중 강원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 화전민들은 강제로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당시 외지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40만원, 아랫마을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20만원을 받았다. 외지로 나간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 그들이 일구던 화전밭의 흔적이 갈은구곡 곳곳에 남아 있다.
    그렇게 서서히 마을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지금은 아랫마을 윗마을 전체를 다 따져도 50가구 정도다. 논농사 짓는 사람이 마을에서 두 명 뿐이다. 십여 년 전에 이 마을을 찾았을 때 보았던 소 ‘먹순이’가 살던 외양간은 벽돌로 지은 헛간이 됐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 뵀던 어르신을 만났다. 못 찾은 9곡을 다시 찾겠다는 말에 어르신이 인도자를 자처하신다.
 어르신의 발걸음이 처음 멈춘 곳은 마당바위다.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천렵하던 곳이라신다. 계곡을 넓게 차지한 바위가 마당 같다. 그 바위 한쪽으로 맑고 푸른 물이 흐른다. 금방이라도 풍덩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인다.
    마당바위 오른쪽에 병풍 같은 바위절벽이 있다. 검은빛이 감도는 절벽 위 바위에 ‘갈은동문’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곳이 은둔자의 거처이자 옛 갈은동 마을, 한때 화전민의 터전 그리고 아홉 가지 경치가 숨어 있는 갈은구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갈은구곡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정취
     ‘갈은동문’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서 어르신이 길 양쪽 옆을 가리키시며 한 번 가보라신다. 길 오른쪽 옆 숲으로 조금 들어가면 커다란 바위가 줄줄이 이어진다. 그중 한 바위에 한자가 줄줄이 새겨졌다. 옛 사람이 새겨놓은 한시 같았다. 그 옆 숲속에는 ‘장암석실’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숲이 우거져 들어가지 못했다. 길 왼쪽으로 내려가니 계곡 건너편에 ‘갈천정’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보인다.  ‘장암석실’이 갈은구곡 중 1곡이고 ‘갈천정’이 2곡이다.
     3곡은 조금 더 올라가면 나오는 ‘강선대’다.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이다. ‘강선대’ 글자가 새겨진 절벽 앞으로 푸른 물이 잔잔하게 흐른다. 강선대에서 왔던 길로 돌아나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정표에 있는 ‘옥녀봉’ 방향으로 간다. 9곡인 선국암까지 계속 ‘옥녀봉’ 이정표를 따라가면서 길 옆 계곡에 숨은 경치들을 찾아봐야 한다.
    갈은구곡 네 번째 숨은 경치인 옥류벽으로 가는 길, 어린 소나무밭 뒤에 옛날 서당이 있었다고 일러주시는 어르신의 눈빛에 서당에 다니던 옛 추억이 묻어난다. 웃자란 풀과 산기슭 개망초꽃이 어우러진 오솔길이 저 멀리 숲으로 들어간다.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서 길이 더 풍요로워 진다.
    숲속 길 옆에 돌을 쌓아 놓은 흔적이 남았다. 옛 갈은동 사람들이 일구던 밭과 논의 흔적이자 화전민들이 살던 흔적이다. 옛 사람들이 살던 흔적을 뒤로하고 도착한 옥류벽, 구슬 같은 물방울이 맺히는 곳이란다.
    다섯 번째 경치인 ‘금병’은 비단 병풍 같은 바위 절벽이 물에 비친 풍경을 두고 붙인 이름이다. 여섯 번째 경치인 ‘구암’은 거북이 모양의 커다란 바위다. 그리고 그 다음에 갈은구곡 경치 중 백미인 ‘고송유수재’가 나온다.
    좁고 깊은 바위계곡이 길게 이어진다. 그 사이로 물이 흐른다. 바위 절벽에 ‘갈은동’ ‘고송유수재’라는 글자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고송유수재’는 ‘늙은 소나무 아래 물가에 지은 집’이라는 뜻이니 누군가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얘기다. 조선 시대 시인의 이름도 보인다. 1800년대를 살았던 양반들의 이름 사이에 벽초 홍명희의 할아버지 이름도 있다. 이곳이 바로 갈은구곡의 백미다.
    8곡인 칠학동천과 9곡인 선국암도 바로 위에 있다. 바둑을 두던 노인들이 해가 지자 다음날 이어서 두기로 하고 다음 날 와봤더니 바둑돌에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 선국암이다. 이를 두고 바둑돌에 서리가 내려 서리꽃이 피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다. 또 누군가는 그 노인들이 신선들이었으며, 선계의 하루가 세속에서는 천년이라 그 긴 세월 그 자리에서 꽃이 피었다고 이야기도 있다. 
    땀에 젖은 얼굴을 계곡물에 씻고 고개 들어 선국암을 바라보는데, 이곳까지 길은 인도해주신 어르신이 선국암에 앉아 계신다. 얼핏 선국암에 앉아 바둑을 두던 옛 신선으로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