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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돌아오라, 시로 피어나는 꽃

2020-04-14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충북문학기행
그대 돌아오라, 시로 피어나는 꽃
'보은 오장환'

    ‘느티나무 속에서 울던 올빼미, 충충한 나무 밑을 무서워하던 동리 아이들’-오장환의 시 <전설>에 나오는 내용은 어디로 갔을까? 햇볕 속으로 사라져버린 세월, 남은 것은 옛 이야기 뿐이었다.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오장환 생가와 마을, 문학관에 남아 있는 옛 이야기.
 
오장환 생가
 
어린 오장환이 뛰어놀던 마을과 그의 생가
    파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맑은 햇살이 돌담 안 초가 앞마당에서 명랑하다. 반쯤 열린 사립문은 누구를 부르는 양 자꾸만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마당에서 흙투성이가 되어 놀던 어린 오장환이 해처럼 웃어줄 것만 같다. 오장환 생가를 찾았다.
    오장환의 어릴 적 별명은 돌멩이였다. 돌멩이처럼 오래 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전나무 우거진 마을-오장환의 시 <고향 앞에서>에 나오는 구절-, 아미산 아래 시냇물, 초등학교 옆 송정봉도 다 보았을 어린 오장환이 뛰어노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오장환은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에서 태어나 10살까지 살았다. 그가 태어난 집과 그가 다니던 회인초등학교도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터에서 어린 오장환을 생각해본다.
    오장환 생가는 4칸 2줄 배기 초가였다. 이엉을 엮어 초가지붕을 올릴 때 보통 30㎝ 정도 두께로 하는데 오장환의 집은 45㎝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부잣집이나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앞마루와 뒷마루가 있고 방이 세 개였다. 광과 부엌이 본채에 붙어있었다. 뒷마당에는 오장환이 살 때부터 만들었던 장독대와 우물이 남아 있었다. 행랑채가 있었지만 헐리고 그 흔적만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고친 건 새마을운동 때였다.
    오장환은 월북했다. 1988년 월북?납북 작가 작품에 대한 해금조치로 오장환의 작품 출판이 허용 됐다. 1989년 오장환 전집이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1996년에 제1회 오장환 문학제가 열렸다. 2005년에 생가 복원 및 문학관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생가의 원래 자리는 문학관 옆 정자 부근이었다. 복원한 생가는 오장환이 살던 때와 비슷한 규모, 구조, 형태를 갖췄다.
 
(左) 오장환 문학관 전시실 입구에 있는 조형물     (右) 오장환 시인이 활동했던 동인지
 
시를 새기는 문학관
    오장환 문학관은 작지만 알차다. 문학관에 전시된 책과 안내문, 시설물을 통해 오장환의 삶과 문학을 들여다봤다.    
    오장환에 대한 안내 글과 문단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중 오장환이 이육사에게 보낸 친필엽서가 눈에 띈다. 이 엽서는 1938년 4월18일 일본에서 보낸 것으로 자작나무 껍질을 씌워 만든 엽서다. 
    ‘나의 길’이라는 제목의 시설물은 미니어처와 녹음된 음성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스승 정지용을 만나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는 이야기, 월북 후 입원해 있던 남포적십자병원에서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오장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설이 있는 시집’은 관람객이 허공에 손을 움직이면 프로그램이 작동되는 ‘아이오포인터 시스템’으로 오장환의 시를 감상하고 시 해설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1933년 그의 나이 16살에 쓴 <화염>은 장미와 호랑나비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시다. 1934년 <바다>, 1936년 <모촌>, 1937년 <황혼>, 1939년 <나의 노래>, 1943년 <길손의 노래>, 1945년 <붉은 산>, 1945년 <병든 서울> 그리고 북한에서 쓴 시를 볼 수 있다. 
    그 중 <나의 노래>가 마음에 남는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중략…/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무덤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 죽음 위에 피어난 영원한 생명, 오장환의 시가 아닐까!
    오장환이 쓴 한국 근대문학 최초의 장시 <전쟁>에 대한 안내 글은 그의 삶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를 더 깊게 만든다. 안내 글에 따르면 <전쟁>은 200자 원고지 72매 분량의 장시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검열을 받고 출판 허가가 난 것은 1935년 1월 16일이다. 당시 검열관에 의해 51행을 삭제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오장환은 아예 출판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17살 때 일이었다.
 
생가 마을 담벼락에 적힌 동시
 
고향 앞에서
    오장환은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정지용을 만나게 된다. 사제지간으로 만난 둘의 인연에서 정지용은 오장환을 특별히 아꼈다고 한다. 1933년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등단에 앞서 휘문고등보통학교 문예지 [휘문]에 시 <화염>과 <아침>을 싣기도 했다. 오장환 문학관에 가면 [휘문] 임시호에 실린 그의 시 <아침>과 <화염>을 볼 수 있다.  
    첫 시집 [성벽]은 1936년~1937년에 쓴 작품을 중심으로 1937년에 출판됐다. 1947년 아문각에서 발행한 재판본이 오장환 문학관에 있다. 두 번째 시집 [헌사]는 1939년 7월 남만서방에서 출판됐다. 남만서방은 오장환이 직접 경영했던 책방이자 출판사였다. 이어 그는 1946년 [병든 서울] 1947년 [나 사는 곳]을 출판한다.
    문학관을 나오며 <나의 노래>가 새겨진 그의 시비를 보고 돌아가는 길, 마을 골목길 담벼락에서 오장환의 동시 <종이비행기>와 <해바라기>를 만났다. 열 살 때 고향을 떠난 오장환이 다시 열 살이 되어 돌아온 것 같았다.
    1927년 고향을 떠난 오장환은 한 번도 고향에 들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랬을까? 그의 시 <고향 앞에서>를 새긴 시비가 마을 큰 길 가에 우두커니 서있다.
    <고향 앞에서> 전략…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양귀비 끓여다 놓고/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 지운다 …중략… 전나무 우거진 마을/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