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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100따라가기
순교자 잠든 묵상의 성지 세 가지 보물을 찾아라
'충북 제천시 배론성지'

맛의 성지, 빵의 성지, 커피 성지, 다이빙 성지, 휴대폰 성지…. 어디에나 ‘성지’를 붙이는 시대다. ‘꼭 가봐야 할’이라는 뜻의 대체어가 돼버린 듯한 성지는 본래 특정 종교에서 신성시하는 장소를 일컫는 말이다. 사색의 계절인 가을 초입에 진짜 성지(聖地)를 찾았다. 충북 제천시 ‘배론성지(천주교 원주교구 배론성지)’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지역문화매력 100선 ‘로컬100’ 중 유일한 천주교 순례 성지이자 피정과 묵상의 성지다.

충북 제천시 배론성지의 ‘마음을 비우는 연못’은 순례 코스의 출발점이다.


배의 밑바닥처럼 생긴 ‘배론’을 찾아서
제천 외곽에서 5번국도를 타고 원주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봉양’이라는 지역명과 함께 배론성지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이어진다. 얼핏 천주교 사제 이름 같지만 ‘배론’은 마을의 계곡이 마치 배의 밑바닥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한 순우리말 지명이다. 왕복 2차로를 따라 한참 들어가 배론성지를 마주하면 그제야 그 이름을 이해하게 된다. 계곡은 배의 바닥 용골 부분처럼 마을 중심을 관통하고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완만한 곡선의 지형이 펼쳐진다. 주변으론 해발 900여m의 구학산과 백운산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다. 마치 요새처럼 자리한 배론성지를 두고 이곳에서 자원봉사 해설을 하고 있는 원영호 씨는 “조선시대 박해를 피해 온 천주교 교인들이 은신처로 삼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험준한 산에 둘러싸여 있고 산길을 통해 경기와 삼남 지방을 몰래 오갈 수 있으니 이곳 배론에서는 신앙 활동뿐 아니라 신자를 길러내는 교육 활동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원 씨의 말이다.
배론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도피해온 천주교 교인들이 모여 이룬 교우촌으로 시작됐다. 지금은 피정과 묵상, 사색의 공간뿐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해 제천10경 중 하나로 꼽힌다.

초록 잔디와 색의 대비를 이루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



천주교 탄압의 도화선이 된 곳
배 밑바닥에 해당하는 계곡을 중심으로 순례 코스는 두 개로 나뉜다. 오른쪽은 배론성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코스, 왼쪽은 잘 가꾼 조각공원과 건축미를 자랑하는 성당을 둘러볼 수 있는 코스다. 출발점인 ‘마음을 비우는 연못’부터 마음을 사로잡는다. 벌써 불그레한 기운의 단풍이 연못 주변을 두르기 시작해 탐방객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성지순례에 앞서 연못 위 아치형 다리에 서서 기념사진 한 장 찍으며 ‘단풍 성지순례’부터 하고 가는 분위기다.
계곡을 곁에 두고 연못을 지나면 무명 순교자의 묘, 그 위로 2층 누각 형태의 성요셉성당이 자리한다. 가까이 진복문 주변으로 ‘배론성지의 세 가지 보물’이 차례로 이어진다. 첫 번째는 ‘황사영 토굴’이다. 조선 후기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1775~1801)이 순교 전 명주천에 편지를 쓰며 지낸 토굴이다.
1801년 신유박해(조선 최초의 대규모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탄압을 피해 도피하던 황사영은 옹기 저장고로 위장한 이곳 토굴에 몸을 숨기고 8개월간 은신하며 백서(帛書)를 완성했다. 중국에 있는 프랑스 신부에게 쓴 백서는 박해로 폐허가 되고 어려움에 처한 조선 교회의 현실과 신유박해 때까지 이뤄진 조선 조정의 천주교 탄압 실태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요지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었으나 교회 재건을 위해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으로 인해 ‘내란’ 혐의가 씌워졌다. 결국 황사영은 거열형에 처해졌고 천주교 박해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백서 원본은 1925년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의금부에서 입수해 로마 교황청에 보내졌고 현재 교황청 바티칸 민속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온전한 형태의 토굴은 1987년 고증해 복원한 것이다. 토굴 부근엔 교인들이 생계를 위해 옹기를 구웠던 옹기가마 굴과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현양탑이 나란히 있다.

左)‘황사영 토굴’은 황사영이 백서를 쓰며 8개월 동안 은신한 곳이다. 右)최양업 신부의 동상


최초의 신학교이자 조선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
배론성지의 두 번째 보물인 ‘성요셉 신학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신학교이자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천주교 성인 장주기(요셉)가 기증한 초가에 1855년 세운 신학당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8명의 신학도를 배출해내지만 1866년 병인박해 때 푸르티에·프티니콜라 신부와 장주기, 그리고 신학생 3명이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면서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20여 년 후 원주시 부흥골 임시 신학교를 거쳐 오늘날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의 모태가 된다. 본채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지금의 신학당은 2003년 충청북도가 지원해 다시 지은 것이다.
‘양업 광장’을 거쳐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십자가의 길’이다. 길 끝엔 배론성지의 세 번째 보물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지’가 있다. ‘피의 순교자’로 불린 최초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와 함께 희생과 헌신으로 천주교를 전파한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가 잠든 곳이다. 최양업 신부는 두 번째 조선인 사제로 서품된 후 압록강을 건너 귀국해 충북 진천의 배티성지를 기반으로 삼남 지방의 127개 공소를 걸어다니며 포교 활동을 했다. 한 해 동안 7000리(약 2800㎞)를 걸으며 천주교 포교에 힘쓰다 1861년 6월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치며 경북 문경에서 눈을 감았다. 최양업 신부의 일생은 계곡 건너편 최양업 토마스 신부 조각공원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左)배론 마을 지형을 본떠 배 모양으로 지어진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 내부 右)초가 형태의 ‘성요셉 신학당’.


‘로사리오 길’ 따라 묵상과 사색
성모 동굴을 끝으로 십자가길은 끝난다. 이어지는 계곡을 건너면 ‘로사리오 길’의 시작이다. ‘로사리오’란 장미정원을 뜻하는 라틴어 ‘로사리움’에서 유래한 말이다. 호젓한 분위기의 로사리오 길은 종교를 떠나 묵상과 사색을 하기에 좋다. 길 옆으론 ‘인생미로’부터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과 조각공원이 차례로 기다린다. 아직 초록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잔디밭과 대비되는 하얀색의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은 배론 마을 지형을 본떠 배 모양으로 지어졌다. 입구 전시실엔 최양업 신부가 집필한 ‘천주가사’와 함께 세라믹 공예화가 맞이한다. 성스러우면서도 웅장한 분위기의 성당에선 미사가 열린다. 미사가 없을 때에도 누구나 조용히 찾아 기도하고 갈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배론성지 내에 있는 최양업 신부의 동상 3개를 찾아보는 것도 배론성지를 제대로 둘러보는 방법이다. 해설사는 “동상마다 포즈와 표정이 다 다르니 자세히 살펴보라”고 했다.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배론성지를 나서는 길, 최양업 신부가 그의 스승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열한 번째 편지 속 한 구절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않고 하느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언젠가는 천국에서 만나뵙게 될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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